충격적인 알파고 출현 10년…완전히 달라진 바둑 풍속도

68승 1패로 은퇴한 알파고 영향에 4천년 바둑 대변화

연구·검토·복기·대표팀 훈련은 '블루스폿' 찾기

독학으로 정상 오른 신진서·서봉수 "AI가 선생님"

AI 치팅 논란으로 온라인 대회 사라지는 폐해도 발생

다큐 '알파고'의 포스터
[구글코리아 제공]

(서울=연합뉴스) 천병혁 기자 =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AI) 알파고(AlphaGo)의 출현은 바둑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오랜 동양 문화유산이자 현존하는 보드게임 중 경우의 수가 가장 많은 바둑은 AI가 근접조차 하기 어렵다고 자만했으나 알파고는 그동안 인간이 보지 못했던 기발한 수법을 구사하며 세계 최고수 이세돌 9단에게 완승을 거뒀다.

인류를 뛰어넘은 AI의 등장이 공포심마저 안긴 가운데 바둑계는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됐다.

지난 수백 년간 성경처럼 믿었던 정석과 포석에 상당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섞여 있었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바둑판은 시작 초반부터 달라졌다.

10년이 흐른 지금은 프로기사들의 공부 방법은 물론 대국 복기와 검토실 풍경, TV 중계 프로그램이 달라지고 AI와 관련된 새로운 규칙마저 생겼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역사적인 첫 대국
[구글 제공]

◇ 4천년 두뇌게임 무너뜨린 알파고

이세돌은 알파고와 대국을 보름여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판이라도 지면 알파고의 승리"라며 5-0 완승을 자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5개월여 전 중국 출신 판후이 2단과 둔 알파고의 기보를 살펴보면 정상급 프로기사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세돌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알파고는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급성장한 것이다.

알파고는 1국 초반부터 강하게 압박하며 주도권을 잡은 뒤 대국 후반 이세돌이 애써 지은 우변 흑진에 폭탄 한 방을 투하해 승리를 결정지었다.

2국과 3국 역시 일방적인 승부였다.

그리고 인류에게 마지막 희망을 안긴 운명의 4국.

4국도 출발은 쉽지 않았다.

미세하게 끌려가던 이세돌은 상변에서 중앙으로 이어진 거대한 흑진에 절묘한 끼임 수를 던졌다.

이른바 '신의 한 수'라고 불리는 78수였다.

이 한 수에 알파고가 처음 흔들렸다.

갑자기 버그를 일으키며 엉뚱한 수를 남발하더니 패배를 선언했다.

이세돌의 극적인 승리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이세돌은 "바둑 한판 이기고 이렇게 박수받을 줄 몰랐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5국에서 더 이상 반전은 없었다.

그렇게 이세돌을 4승 1패로 꺾은 알파고는 더 진화했다.

이후 온라인 대국에서 프로기사들에게 60전 전승을 거둔 알파고는 중국 랭킹 1위 커제 9단과 3번기, 단체 상담기까지 합쳐 모두 68승 1패를 기록한 뒤 은퇴했다.

이세돌과 대국 이후로는 버그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노트북을 켜고 대국을 검토 중이다.
[한국기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연구·검토·복기…모든 정답은 AI '블루스폿'

과거 바둑계는 연구 모임이 아주 활발했다.

프로기사들이 모여 포석과 행마, 사활, 끝내기 등을 공동 연구하며 실력을 쌓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고성능 그래픽카드(GPU)를 장착한 노트북만 있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

각종 대회 때 프로기사들이 모이는 검토실과 대국 후 복기하는 방법도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고참 프로기사가 검토를 주도했으나 지금은 노트북을 켜놓고 AI 프로그램이 파란색으로 알려주는 정답인 '블루스폿'(blue spot)을 연구한다.

또 장시간 벌어졌던 대국 후 복기 시간도 대폭 줄었다.

대국자끼리 의견을 나누기보다 집에 돌아가서 노트북을 켜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게 훨씬 정확하기 때문이다.

복기 방법도 과거처럼 감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확률과 수치로 재구성한다.

TV 중계는 한 수 둘 때마다 AI가 승률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아마추어 팬들이 대국을 훨씬 쉽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신진서 9단
AI에 최적화된 신진서 9단의 별명은 '신공지능'이다.[한국기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바둑 국가대표팀 훈련에서도 AI 프로그램은 필수적이다.

선수들은 최적의 수인 블루스폿을 찾는 데 공을 들인다.

다만, 블루스폿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는 각자 능력 차이가 있다.

아무리 AI 추천 수를 알려줘도 납득하지 못하면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75개월 연속 한국 랭킹 1위를 달리는 신진서 9단은 AI에 최적화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장 AI를 잘 이해한다는 신진서는 별명조차 '신공지능'이다.

칠순이 넘은 원로 프로기사 서봉수 9단도 AI를 통해 공부한다고 했다.

알파고 등장 이후 AI 프로그램을 접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터넷으로 연습 대국을 두고 있다.

신진서와 서봉수는 바둑계에서 드물게 스승 없이 독학으로 정상에 오른 프로기사로 유명하지만, 이제는 "AI가 선생님"이라고 입을 모았다.

리쉬안하오 9단
[한국기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진 온라인 대회

AI가 바둑계에 은총만 내린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없던 '치팅'(cheating) 논란이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치팅이란 바둑이나 장기, 체스 등 보드게임에서 AI의 도움을 받는 부정행위를 뜻한다.

2022년 12월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4강전에서 중국 프로기사 리쉬안하오 9단이 세계 최강자인 신진서 9단에게 예상을 뒤엎고 완승하자 거센 논란이 일었다.

당시 리쉬안하오의 바둑은 AI 일치율이 무려 85%에 이르며 사람이 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했다.

그 대회 8강에서 리쉬안하오에게 졌던 중국 국가대표 양딩신 9단은 신진서마저 패하자 공개적으로 치팅 의혹을 제기했다.

양딩신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모든 신호가 차단된 대국장에서 화장실에 가면 안 되고 시간제한도 없이 20번기를 두자"며 "만약 내가 (리쉬안하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면 은퇴하겠다"고 저격했다.

사실 리쉬안하오는 그 대회 이전에도 치팅 의혹을 받았다.

남들은 하락세를 그리는 20대 후반에 온라인 대국을 통해 성적이 급격하게 좋아져서다.

중국 바둑계는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리쉬안하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중국기원은 구체적인 사실 조사 없이 의혹을 제기한 양딩신에게만 6개월 출전금지 징계를 내리며 사건을 일단락했다.

대국실 입장 전 전자기기 검사받는 신진서 9단
[한국기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내에서도 온라인 대회에서 몇 차례 치팅 논란이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확산 시기에 모든 바둑대회가 온라인으로 열리면서 전자기기 검사는 필수가 됐다.

그러나 입단 대회를 비롯해 일부 대회에서 참가자가 치팅으로 적발돼 중징계받은 사례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온라인 대회가 지금은 아쉽게도 거의 사라졌다.

AI가 스승인 시대에 AI 때문에 온라인 대회가 열리지 않는 것은 인간의 지나친 승리욕 때문일 것이다.

shoeless@yna.co.kr

핫 뉴스

뉴스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