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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
[풋볼리스트=칸차나부리(태국)] 지난달 26일, 베트남 축구가 다시 동남아를 제패했다. 김상식 감독의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현대컵 아세안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것이다.
한때 '도요타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대회는 오랜 시간 태국의 독무대였다. 격년제로 열리는 이 대회에서 베트남은 2008년 우승 이후 4회 연속 결승에 오르지 조차 못했다. 그런 베트남을 정상에 앉힌 것이 바로 박항서 감독이다. 2018년 박항서 체제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베트남은 그때부터 5차례 대회 가운데 4차례 결승에 올라 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베트남 축구 역사를 새로 쓴 박항서 감독은, 5년 여의 임기를 보낸 지난 2023년 1월 지휘봉을 놓았다. 그 뒤 베트남 박닌FC 고문을 맡은 것을 제외하면 박 감독의 유일한 공식직함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었다. 국내외 수 많은 대표팀과 클럽들의 러브콜을 마다하던 박항서 감독은, 뜻밖에 태국을 목적지로 정했다. 베트남도 한국도 아닌, 그것도 2부리그 클럽팀 감독으로 새로운 커리어를 결정한 박 감독은, 2026년 6월 북중미 월드컵을 대한민국 선수지원단장으로 다녀온 뒤 축구협회 부회장을 사임하고 태국으로 떠났다.
박 감독을 만나러 칸차나부리로 가는 동안, 머릿 속엔 으리으리한 저택이 떠올랐다. 태국 2부리그 클럽이 모셔갈 정도였으니 얼마나 잘해드렸을까? 이런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곳은 유치원을 개조한 평범한 주택이었고, 아직 홀로 생활하고 있는 박 감독은 손수 세탁한 빨래를 바깥에 직접 내다 말리는 중이었다. 낯선 도시, 낯선 풍경, 하지만 익숙한 표정의 박항서 감독과 좁은 거실 식탁에서 얘기를 나눴다.
Q. 칸차나부리, 낯선 도시입니다. 이 곳 연고의 팀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박항서) 감독직 제안을 받은 것은 좀 오래 됐습니다. 여기 주지사님과 이사회 멤버들이 한국까지 와서 제안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3년이나 현장에 없었고 클럽을 맡기엔 부담이 너무 컸거든요. 그런데 칸차나부리 관계자들의 진정성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감독으로서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해주면서 팀을 제대로 만들고 싶어하는 의지가 보였어요.
Q. 베트남도 한국도 아닌 곳을 택한 것은 의외인데요?
박항서) 베트남은 제가 오래 있었던 곳이죠. 김상식 감독이 지금 베트남 대표팀을 잘 이끌고 있고요. 반면에 태국은 한국 출신 지도자들이 활동을 많이 안 한 곳이에요. 한국 감독도 할 수 있다는걸, 아직 결과는 모르지만, 그런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Q. 2부 클럽이라는 점 역시 예상 밖이었습니다.
박항서) 제가 제안을 받고 수락했을 때는 1부리그 클럽이었어요. (웃음) 그러다 지난 시즌에 2부로 강등이 된거죠. 준비 잘 해서 1부로 다시 승격시킬 겁니다.
Q. 한국에서도 제안이 많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워낙 고사를 많이 해서 "박항서는 이제 감독 그만하려고 한다"는 루머도 있었습니다.
박항서) 진짜 감독 다시 안할 생각이었어요. 베트남 국가대표팀 지휘봉 놓고 나서 동남아 국가들, 대한민국 프로팀들, 감독직 제의, 단장, 사장직 제의 많이 왔습니다. 동남아의 한 국가 같은 경우는 조건도 굉장히 좋았고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동남아 국가의 대표팀, 그러니까 우리 베트남과 라이벌인 나라의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면... 베트남하고 붙는거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더군요. 제가 우리 베트남 국민들한테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잖아요. 몇 군데 제의가 있었는데, 아내와 상의해 내린 결론은 "동남아 국가대표팀은 가지 말자"였습니다. 베트남을 A매치에서 상대팀 감독으로 상대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한국에서의 제의는, 후배들이 잘 하고 있는데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시도민구단 사장직 제안도 왔었는데 제가 시도민구단 생리를 잘 알잖아요. 경남FC 감독하면서 많이 봤으니까.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Q. 월드컵 일정 마치고 태국 건너오신지 한 달이 넘었죠?
박항서) 7월 7-8일쯤 왔어요. 1부리그 승격을 목표로 팀을 준비 중인데 아직 팀 상황의 여의치 않습니다. 특히 주전과 비주전 실력 차가 많이 나요. 2부로 떨어지다 보니까 선수 영입도 쉽지 않은 면이 있었고. (9월에 개막하고) 1월 이적시장 열리면 추가 보강을 할거고 그전까지 잘 이끌어야죠.
Q. 북중미 월드컵 끝나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을 내려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미리 사의를 밝힌 상태였지요?
박항서) 월드컵 단장을 맡기는 했지만, 대회가 끝나면 칸차나부리 감독을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월드컵 이전에 미리 얘기는 해뒀습니다. 사직서도 첫 경기 시작 전에 제출했고요.
Q. 아쉽지만 지난 월드컵은 성공적인 대회로 기억되지 못하게 됐습니다. 단장으로서 소회가 있다면?
박항서) 제가 감독은 많이 해봤지만 단장은 처음이잖아요. 단장 역할에 대해 잘 몰라서 협회에 물어보니 아무도 말을 안 해줘요. 나한테 보고하는 사람도 없고. 단장직에 대한 권한이나 역할을 확실히 전달받은게 없었어요. 진작 그 부분을 확인받고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Q.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이른바 '기자 손흥민 뒷담화' 파문이 컸는데 이게 대회 기간 내내 선수단 주요 이슈 중 하나였습니다. 단장으로서 그 사건이 선수들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나요?
박항서) 이 얘기부터 할게요. 저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보고를 못 받았어요. 저는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감독 코치 미팅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나중에 우연히 전무와 전력강화위원장이 온 자리에서 오가는 얘기 듣고 알았습니다. 뒤늦게 그 영상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야, 이거 너무 심하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협회 관계자들한테 빨리 조기에 수습 잘하라고 얘기했어요.
Q. 그런데도 파문이 꽤 길게 이어졌습니다.
박항서) 해결이 안되더라고. 제가 그래서 협회 팀장들한테도 그랬어요. 일을 무슨 이딴 식으로 하냐고. 화를 냈지. 그런데 딱히 바뀌는 게 없었어요. 그러던 중에 손흥민 이재성이 저를 찾아옵니다. 첫 경기(체코전) 끝난 뒤에. 해결해달라고.
Q. 두 선수가 직접 SOS를요?
박항서) 저는 선수들이 어떤 걸 요구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때 처음 들었는데 딱 3가지더라고. 첫째, 공개 성명서로 유감 표명하고 내용에 해당 기자 실명을 포함해달라. 둘째,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아달라. 세 번째, 공식적으로 취재 거부 방침을 세워달라.
Q. 구체적이었군요.
박항서) 그런데 진전 없는 상태로 2차전이 다가왔죠. 그래서 빨리 해결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재성 손흥민 황인범 황희찬 선수들 불러서 협회 팀장들, 전무, 이렇게 대면을 시켰어요. 그런데 별다른 해결이 안된 채로 2차전 멕시코전을 치르게 됐죠. 선수들 말에 저는 공감이 가요. 저를 찾아왔던 선수들이 10년 넘게 대표 선수를 했잖아요. 협회에 불만이 쌓여있고 신뢰도가 떨어져 있더라고요. 이번 사건이 명백한 인신공격인데, 구단 같으면 적극 대응을 해줄텐데 왜 협회는 선수 보호를 안 해주냐고 하소연을 해요. 제가 선수라도 정말 화가 났을 거예요. 협회에서 적극적으로 대응을 안 해주면 선수들은 누구를 믿고 뛰겠습니까.
Q. 그 와중에 협회 공식 성명서가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박항서) 들어보니 선수들이 (해당 기자의) 이름 없이 올려서 항의를 한 모양이예요. 다만, 그 사이 기자단 대표가 와서 선수들 앞에서 공개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기자는 협회 공동 취재에 참여하지 않는걸로 합의를 했죠. 경기장에 취재 오는거야 막을 수가 없는 거니까. 이렇게 선수들 요구가 3가지였는데 성명서에 해당 기자 이름이 빠진 거 말고는 다 관철이 됐다고 봐야죠. 그래서 선수들에게 "이제 마지막 한 경기 남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한 마음으로 잘해보자. 단장으로서 선수들 보호막을 제때 쳐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어요. 인터뷰 재개 언급은 따로 안 했습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그 뒤로 다시 인터뷰 재개했더라고요.
Q. 그렇게 치러진 남아공전, 결과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박항서) 정말 모르겠어요. 감독이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고 하니 결과가 나쁜건 감독의 몫이죠. 감독 스스로 말했지만 감독의 몫이고, 그래서 많은 실망을 시키고 비난도 받았죠. 감독이 권한도 있지만 그만큼 막중한 책임도 따르는 자리입니다.
Q. 한국 축구에 계속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협회에 대한 책임론도 많고요.
박항서) 축구협회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그 카르텔을 깨야 합니다. 협회 행정은 오랜 시간 변한게 없어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협회가 좀 더 자세 낮추고 좋은 후배들이 잘 설계해서 이끌어 나가도록 해야죠. 월드컵 탈락하고 (홍명보 감독) 사임 발표할 때 임원들 다 있었어요. 협회장님부터 다 있었는데 오늘 감독이 사과문 발표할 거라고 단장님도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속으로는 '회장님이 여기 계신데 내가 하는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단장으로서 책임감이 있으니까 하겠다고 했죠. 직원들이 사과문 초안을 가져왔는데 딱 한 줄 고쳤어요. "뼈를 깎는 성찰을 하겠습니다"라고 되어있는데 난 그때 이미 사표를 낸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해당 문구를 "성찰을 해야할 것입니다"로 수정했어요.
그리고 원래는 나, 전무, 전력강화위원장 3명이 앉아서 발표하기로 했었는데 다들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혼자 했어요. 기자 질의응답 없이 끝낸 것도 난 이해가 안됐어요. 정면돌파할 때는 해야지, 깨끗이 잘못 인정하고 돌팔매 맞을게 있으면 맞고.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귀국할 때도 공항 나올때 다들 서로 눈치들을 보길래 이게 내가 해야 할 도리다 싶어서 앞장서서 나왔습니다.
Q. 마치 박항서 부회장을 방패막이 삼은 것 같네요.
박항서) 그냥 저는 제 도리를 한 거죠. 청문회의 경우는, 제가 여기(태국) 와 있는 상황이라 갈 수 없기도 했고 만일 제가 갔더라도 "왜 졌어요?" 물어보면 제가 할 말이 없잖아요. 단장이라고 직함은 받았는데 권한이나 역할이 뭐 없었으니까. 진작 그 부분을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게 후회되긴 합니다.
Q. 결국 행정적 문제도 월드컵에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겠네요.
박항서) 현장에서 그 문제를 겪은 실무자급들이 가장 잘 알 거예요.
Q.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박항서) 제가 협회 부회장 맡기 전에 이영표 박주호 비롯해 몇몇 젊은 친구들하고 식사한 적이 있어요. "너희들이 협회 들어가야 한다." 저만해도 옛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선진 축구에서 행정을 비롯해 많이 배운 친구들이 있잖아요. 이 후배들이 주가 되어서 하도록 밀어줘야죠. 우리 같은 사람들은 훈수 둘 생각하지 말고요. 다 우리보다 똑똑한 후배들이니까. 차기 회장 선거에 참여할 선거인단 분들이 정책 잘 들어보고 누가 정직한지 잘 가려서 선택을 하면 좋겠어요. 이제 한국 축구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축구가 한 단계 도약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글=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축구해설위원)
사진= 풋볼리스트,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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