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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나프타 수급 위기가 산업 전반을 강타하고 있다. 종량제 봉투 사재기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러다 라면 봉지도 못 만들고 배달 용기도 바닥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 나아가 배달 서비스까지 축소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사태의 출발점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하면서 해협 통행량이 급감했고, 국제유가는 전쟁 개시 직후부터 가파르게 치솟았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보다도 상승 속도가 빠르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원유 가격 상승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카타르, 이란 등 걸프만 산유국의 원유가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이 해협을 통해 조달하고 있으며, 나프타 역시 중동산 수입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이 길이 막히자 나프타 가격은 전쟁 이전 대비 두 배 가까이 급등했고, 물량 자체를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대체 항로를 이용할 경우 수송 비용이 크게 뛰고, 현재 가동 중인 우회 송유관의 처리 능력은 기존 해협 물동량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란의 봉쇄가 길어질수록 대체 경로의 한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나프타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의 핵심 원료다. 에틸렌은 자동차·전자·건설·섬유·플라스틱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쓰이는 대표적 중간재다. 나프타를 분해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같은 기초 화학물질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비닐·플라스틱·합성섬유 등으로 변환된다. 라면 봉지, 과자 포장, 음료 페트병, 즉석식품 트레이 등 사실상 모든 가공식품이 이 공급망 위에 놓여 있다. 나프타 수급이 흔들리면 한국 제조업 전체가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공장 가동 중단은 이미 현실로 나타났다. LG화학은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내 나프타분해시설(NCC) 2공장 가동을 결국 중단했다. 여수 2공장은 나프타를 분해해 연간 80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시설이다. 호르무즈 봉쇄로 나프타 수급이 꽉 막히고 재고량도 줄면서 시설을 멈춘 것으로, 현재는 연간 120만 톤 규모의 1공장 가동만 유지하고 있다. 여천NCC도 일부 시설을 멈추고 고객사에 공급 불가항력을 통보했으며, 롯데케미칼 여수공장은 정기 보수 일정을 3주가량 앞당겨 가동을 중단했다. 국내 나프타 재고는 2주 분량 수준으로 추정되며, 주요 나프타분해설비 가동률은 기존 수준에서 크게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업황 둔화로 대부분 기업이 운영자금과 재고를 최소화해온 탓에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여수 산단에서 시작된 셧다운 공포는 공급망을 타고 중소 플라스틱 업체로 번지고 있다. 합성수지를 공급받는 국내 중소 플라스틱 업체들은 대기업으로부터 공급 축소 또는 중단 통보를 받으며 직격탄을 맞았다.
석화업계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화하는 순간 수급 영향이 곧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나프타 가격이 급등하면서 원가 부담이 크게 늘었는데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이 부담을 제품 가격에 전가할 수도 없는 이중고에 처했다는 것이다. 대체 물량을 찾고 있지만 중동 상황이 불확실한 만큼 장기계약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단발성 계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가격이 치솟으면 실익이 없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식품·외식업계도 포장재 수급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식품 포장에 쓰이는 폴리프로필렌(PP)·폴리에틸렌(PE)·페트(PET) 등의 주요 소재가 모두 나프타에서 추출된다. 업체들이 보유한 포장재 재고는 통상 1~3개월치에 불과해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 포장재 가격 문제를 넘어 아예 제품 출고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배달용기도 마찬가지다. 주로 PP를 원료로 만드는 배달용기 역시 원료 수급 불안이 이어지면서 물량 확보에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배달 관련 업계에서는 거래처로부터 이미 공급 지연과 가격 인상 통보를 받았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나프타 대란이 길어지면 배달 서비스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같은 불안 심리는 소비자들의 종량제봉투 사재기로 이어졌다. 종량제 봉투의 주원료인 폴리에틸렌(PE) 가격이 나프타 부족으로 급등을 예고하자 미리 봉투를 쟁여두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됐다. 마트와 편의점 매대가 텅 비는 사태가 잇따랐고, 일부 대형마트와 편의점에는 구매 수량을 1인당 한두 장으로 제한하는 안내문이 붙었다.
석유화학 업계는 정부에 구조적 대책 마련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나섰다. LG화학 측은 원유나 액화천연가스처럼 나프타에 대한 정부 차원의 비축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플라스틱공업협동조합연합회 측도 전쟁 이후 나프타 가격이 톤당 20만원 이상 올랐고 추가 인상과 공급 중단 가능성까지 통보받은 상황이라면서 공급 안정과 가격 급등 방지, 원자재 가격 연동제 도입을 건의했다.
정부는 초강수 대응에 나섰다. 향후 5개월간 국내 생산 나프타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물량을 국내로 돌리는 조치를 시행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확보한 대규모 원유를 우선 도입하고 국제에너지기구(IEA)와 공조해 비축유 방출도 추진 중이다.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으며,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도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양기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도입 원유 물량이 평소보다 줄어드는 것은 맞지만 대체 물량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고 비축유 방출 계획도 차질 없이 진행된다면 당장의 수급 위기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업계의 시선은 다르다. JP모건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상태가 유지될 경우 강제 감산 규모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국제유가가 현재보다 크게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해양진흥공사도 해협 통행 제한이 한 달간 이어지면 국내 원유와 LNG 도입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판로가 막힌 중동 산유국들의 감산 행렬도 수급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다. 업계에서는 단기 대응은 가능하지만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구조적인 수급 불안은 피하기 어렵다는 경고가 거듭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는 한국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프타 공급이 막히고 가격이 급등하자 석유화학 공장이 멈추고, 포장재가 부족해지고, 배달용기 가격이 뛰고, 종량제 봉투 사재기가 벌어지는 일련의 연쇄 반응이 불과 수주 만에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평시에는 문제가 없으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되는 순간 공급망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로 다시 확인됐다. 원유나 LNG처럼 나프타에 대한 정부 차원의 비축 정책을 수립하고,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수입선 다변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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