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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슈퍼사이클이 한국 경제에 예상치 못한 숙제를 던지고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직원들이 받는 역대급 성과급이 결국 다른 산업의 월급과 나라 전체 물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관측이 늘고 있어서다. 호황으로 늘어난 돈은 일부 고소득 직장인에게 쏠리는데 물가와 금리가 오르는 부담은 저소득층이 더 크게 떠안는 구조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에 예상보다 더 걷힌 세금(초과세수)을 활용해 형편이 어려운 계층을 따로 골라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22일 국가데이터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10월) 기준 임금근로자 2248만8000명 가운데 최근 3개월 월평균 임금(상여금 포함·세금 떼기 전)이 500만원을 넘는 사람은 전체의 16.5%인 371만3000명이다. 2013년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인원과 비중 모두 가장 많다. 500만원 이상은 데이터처가 나눈 임금 구간 가운데 맨 위 칸이다. 그만큼 고소득 근로자 층이 두꺼워졌다는 뜻이다.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에 비례해 큰 성과급을 주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기업이 늘어난 점도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이다. 한국은행 분석을 보면 업계 상위 10% 수준의 성과급을 주는 기업이 많아질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개월 뒤 0.05%포인트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산업이 보너스를 고르게 10%씩 늘리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지만, 반도체처럼 특정 업종에만 몰아서 오르면 시간이 지나 물가를 눈에 띄게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 한은 진단이다.
실제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속한 정보기술(IT) 업종의 보너스성 급여는 올해 1분기에 1년 전보다 60.6% 급증했다. 같은 기간 전체 임금이 3.4% 오르는 동안 이 가운데 1.3%포인트를 IT 업종이 떠받친 것으로 분석됐다. 성과급 규모가 유난히 크게 불어나면 다른 산업 임금이 덩달아 오르는 힘도 평소의 10배까지 세지는 것으로 한은은 추정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도 월급 인상과 소비 증가 양쪽에서 물가를 밀어 올리는 힘이 강해졌다면서 소비자물가가 한동안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 총재는 중동 사태로 석유류 가격이 20% 넘게 뛰었고, 가격 변동이 큰 농산물·석유류를 뺀 근원물가까지 2%대 중반으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또 장바구니에서 직접 느끼는 체감 물가가 공식 지표보다 더 가파르게 올라 저소득층 생활비 부담을 키우고 있다고 짚었다.
한은은 기준금리를 연 2.50%로 여덟 차례 연속 묶어두고 있지만,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7%로 올려 잡으며 금리를 올릴 여지를 남겨뒀다. 일부 민간 연구기관은 한은이 하반기에 두 차례 금리를 올려 3.00%로 끌어올린 뒤 내년 상반기 추가 인상을 거쳐 최종 3.50%까지 갈 수 있다고 본다.

성과급으로 풀린 돈이 소비를 넘어 부동산 같은 자산시장으로 흘러드는 흐름도 부담을 키운다.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성과급과 집 없는 직원에게 싼 이자로 빌려주는 사내대출 등을 통해 내년까지 시장에 풀 수 있는 부동산 대기 자금은 최대 53조6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성과급에서 23조원, 사내대출에서 30조원 안팎이 나올 수 있다는 계산이다. 삼성전자에서만 36조6000억원, SK하이닉스에서 17조원가량으로 추정된다.
이는 4월 기준 시중에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돈(협의통화·M1) 1371조5000억원의 3.6%에 맞먹는 규모다. 특히 회사가 직원에게 해주는 사내대출은 정부의 대출 규제(DSR)를 적용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DSR은 한 해 소득에 견줘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으면 대출을 막는 제도인데, 사내대출은 여기서 비켜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규제로 대출이 막힌 일반 실수요자와 달리 대기업 직원들은 사내대출로 추가 자금을 마련해 집을 살 수 있어, 출발선이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렇게 풀린 돈이 향하는 길목은 이미 '셔세권'(셔틀버스+역세권)이라는 신조어로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 통근 셔틀버스가 지나는 용인 수지, 성남 분당, 하남, 수원 영통, 화성 동탄 등의 아파트값이 수도권 평균을 웃도는 상승세를 보였다. 집값이 뛰면 전세·월세 같은 임대료 인상으로 번지면서 주거비 물가를 끌어올리고, 이는 다시 사람들이 '앞으로도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 믿는 기대심리(기대인플레이션)를 자극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호황이 정작 저소득층에는 잘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 임금 500만원 이상 비중은 제조업에서 24.0%에 달했지만 보건·사회복지업은 5.4%, 숙박·음식점업은 1.4%에 그쳤다. 임금 상승이 반도체 제조업을 중심으로 일어나다 보니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저소득층에게는 사실상 남의 잔치인 셈이다.
반대로 물가가 오를 때 받는 충격은 저소득층이 더 크다. 식료품·에너지·교통·주거비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항목에 소득의 상당 부분을 쓰기 때문이다. 이런 필수 지출 물가가 오르면 세금 등을 빼고 실제 쓸 수 있는 돈(가처분 소득)이 더 빠르게 줄어든다. 게다가 물가를 잡으려 한은이 금리를 계속 올리면, 호황을 누리지 못한 자영업자와 빚 갚을 형편이 빠듯한 취약차주(다중채무자이면서 동시에 저소득 또는 저신용 상태인 채무자), 금리가 오를 때마다 이자 부담이 커지는 변동금리 대출자가 먼저 흔들릴 수 있다. 호황의 몫은 위쪽이 챙기고 긴축의 고통은 아래쪽이 떠안는 구조라는 우려가 정책 당국 안에서도 흘러나온다.
이에 따라 물가 상승 압력에 맞서 예상보다 더 걷힌 세금을 활용해 형편이 어려운 계층만 골라 돕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제언이 힘을 얻는다. 과거 재난지원금처럼 모든 국민에게 현금을 푸는 방식은 오히려 소비를 늘려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는 만큼 정해진 용도로만 쓸 수 있는 에너지·식료품 바우처(상품권)처럼 쓰임새를 묶은 지원으로 충격을 덜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월급이 뚜렷이 오르는데도 물가를 2% 안팎으로 눌러온 일본식 대응이나 특정 품목 값이 일정 선 이상 오르지 못하게 막는 가격 상한제처럼 물가를 직접 건드리지 않는 재정 투입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다만 성과급 때문에 물가가 크게 오를 것이란 걱정이 지나치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반도체 성과급으로 전체 보너스 지급액이 늘더라도 경제 전반의 임금 상승률을 끌어올리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기준금리가 아직 높은 수준인 데다, 성과급의 상당 부분이 소비나 집 구입 대신 기존 빚을 갚거나 예금·적금으로 묶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경우 풀린 돈이 수도권 전역으로 번지기보다 일부 인기 지역에만 몰리는 선택적 상승에 그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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