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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 들어온 날에는 통장 잔액이 넉넉해 보인다. 이번 달에는 꼭 일정 금액을 남기겠다고 마음먹지만 카드값과 공과금이 빠져나가고 식비와 쇼핑비가 이어지면 저축은 다시 다음 달로 밀린다. 돈을 모으려는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쓸 돈과 남길 돈이 한곳에 섞여 있어 경계가 흐려진 탓일 수 있다.
반대로 월급날 저축할 금액을 다른 통장으로 옮겨두면 같은 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생활비 통장에 남은 돈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으로 보지만 저축 통장에 들어간 돈은 쉽게 꺼내 쓰지 않는다. 계좌 명의도 같고 돈의 가치도 같지만 보관된 장소와 부여한 목적에 따라 심리적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생활비 통장에 있는 10만 원과 비상금 통장에 있는 10만 원은 차이가 없다. 어느 계좌에 들어 있든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가치는 같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가진 돈을 언제나 하나의 큰 자산으로 묶어서 판단하지 않는다.
월급은 생활을 유지하는 돈으로 보고 상여금은 평소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예상하지 못한 환급금이나 용돈은 같은 액수의 근로소득보다 쉽게 소비하기도 한다. 여행을 위해 모은 돈과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한 비상금도 서로 다른 성격의 자금으로 취급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처럼 돈을 출처나 용도에 따라 마음속에서 구분해 관리하는 현상을 '심적 회계(Mental Accounting)'라고 부른다. 실제 지갑이나 통장만 나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도 생활비와 저축금, 여가비를 담아두는 별도의 칸이 생기는 셈이다.
심적 회계가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돈의 가치는 같지만 어느 항목에 속했는지에 따라 소비 여부를 다르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성향을 저축에 활용하면 계획한 자금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급여와 생활비, 저축할 돈을 하나의 통장에서 관리하면 전체 잔액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금액보다 크게 보일 수 있다. 통장에 300만 원이 있더라도 이 가운데 100만 원을 저축할 계획이라면 이번 달 소비에 쓸 수 있는 돈은 200만 원이다. 그러나 두 금액이 한곳에 섞여 있으면 눈에 보이는 300만 원이 소비 판단의 기준이 되기 쉽다.

지출이 생길 때마다 머릿속으로 저축 예정액을 제외하고 계산해야 하지만 이를 매번 정확하게 유지하기는 어렵다. 월초에는 계획을 기억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카드값이나 예정된 고정비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계좌에 표시된 잔액과 실제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저축액을 별도 계좌로 옮기면 생활비 통장에는 이번 달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만 남는다. 잔액이 줄어든 만큼 소비 가능 범위도 분명해진다. 통장을 나누는 방식은 소득을 늘려주지는 않지만 지출 판단에 사용하는 기준을 바꾼다.
생활비가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기도 쉬워진다. 한 통장에서 저축액과 고정비를 계속 구분해 계산하는 대신 현재 잔액을 중심으로 남은 기간의 지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복잡한 가계부를 꾸준히 작성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계좌 자체가 예산의 경계 역할을 한다.
생활비 통장에 있는 돈을 쓰는 것과 저축 통장의 돈을 옮겨 쓰는 행동은 심리적으로 같지 않다. 별도 계좌에 모아둔 돈에는 이미 비상금이나 전세 자금, 여행비와 같은 목적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축 통장의 돈을 꺼내려면 처음 정한 목표를 미루거나 포기한다는 판단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작은 심리적 부담이 생긴다. 계좌 이체에 드는 시간은 짧지만 사용해도 되는 돈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모든 돈이 한 계좌에 있다면 이러한 경계가 약하다. 생활비와 저축 예정액이 섞여 있어 지출이 저축 계획을 침범했는지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반면 계좌가 분리되어 있으면 생활비가 부족해진 사실과 저축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선택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불편함은 충동적인 소비를 줄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저축금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장치는 아니지만 소비 결정을 한 번 더 검토하도록 만든다. 저축을 의지만으로 유지하는 대신 돈을 꺼내는 과정에 작은 단계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저축이 자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소비를 마친 뒤 남은 돈을 모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필요한 지출과 예상하지 못한 소비가 이어지면 월말에 남는 금액은 처음 생각한 것보다 줄어들 수 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일정 금액을 저축 통장으로 자동 이체하면 순서가 바뀐다. 먼저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매달 저축 여부를 새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며 월급날의 계획이 실제 자금 이동으로 이어진다.

자동 이체는 저축액을 눈앞의 소비 예산에서 일찍 제외하는 역할을 한다. 생활비 통장에 남은 금액이 줄어들면 그 범위에 맞춰 지출을 조절하게 된다.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는 것과 생활하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은 계산 결과가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소비 과정에서는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다만 저축액은 소득과 고정비를 고려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해야 한다. 지나치게 많은 금액을 옮긴 뒤 매달 다시 생활비 통장으로 가져와 쓴다면 계좌를 나눈 의미가 약해진다. 일정 기간 실제 지출을 확인한 뒤 유지 가능한 금액을 설정하는 편이 적절하다.
저축 통장에 목적을 붙이는 것도 중요하다. 막연히 '여유 자금'이라고 정하는 것보다 비상금이나 주거 자금, 휴가 비용처럼 사용 시점을 구분하면 해당 돈을 왜 남겨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목표 금액이 정해져 있으면 진행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비상금 500만 원을 목표로 삼았다면 현재 잔액이 목표의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소비를 참는 과정이 아니라 정해진 금액에 가까워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진다.

목적별 통장은 서로 다른 시기의 지출을 구분하는 데도 유용하다. 생활비는 현재의 소비를 위한 돈이고 비상금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위한 돈이다. 장기 저축은 더 먼 시점의 필요를 준비하는 자금이다. 사용 시점이 다른 돈을 한 계좌에 두지 않으면 현재 소비가 미래 자금을 잠식하는 것을 방지하기 쉬워진다.
통장 분리가 언제나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계좌가 많아지면 잔액과 자동 이체 일정을 관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자금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 전체 자산이 얼마인지 한눈에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심적 회계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높은 이자를 부담하는 빚이 있는데도 저축 통장의 돈은 건드릴 수 없다고 여기거나, 한 계좌의 부족한 자금을 채우기 위해 불필요한 금융 비용을 지불하는 식이다. 돈에 부여한 목적은 관리 수단일 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다.

계좌는 급여와 고정비를 관리하는 통장, 한 달 생활비를 쓰는 통장, 비상금이나 단기 목표를 위한 통장, 장기 저축을 위한 통장 등 3~4개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의 소득 형태와 소비 습관에 따라 필요한 계좌 수는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개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각 통장의 역할이 겹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통장을 나누면 없던 돈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사용할 돈과 남겨둘 돈을 눈에 보이게 분리하고, 저축금을 꺼내 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같은 소득 안에서도 돈의 자리를 먼저 정해두면 저축은 매달 반복하는 결심보다 관리 가능한 생활 구조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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