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자산·자금세탁방지까지…은행권 디지털자산 경쟁 본격화

디지털자산이 투자 수단을 넘어 결제와 금융 인프라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은행이 맡아야 할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KB국민은행과 카카오그룹이 국내외 금융·디지털자산 업계 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자산 관리와 자금세탁방지 등 기존 금융회사가 담당할 수 있는 기능을 논의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연합뉴스

150명 모인 디지털자산 행사…KB가 강조한 건 '신뢰'

KB국민은행은 지난 28일 서울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카카오그룹과 'Next Finance Korea 2026' 컨퍼런스를 개최했다고 29일 밝혔다.

'East Point: Seoul 2026' 행사의 하나로 열린 이번 컨퍼런스에는 국내외 디지털자산과 금융산업 관계자 150여 명이 참석했다. 디지털자산 시장의 변화와 금융사의 역할을 논의하고 업계 간 협력 접점을 확대하기 위한 자리다.

KB국민은행에서는 서기원 경영기획그룹 부행장과 이상률 DT추진부장이 각각 기조연설과 토론 세션 발표자로 참여했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강조한 부분은 기술 자체보다 금융의 기본 기능인 '신뢰'였다.

서 부행장은 'KB의 디지털자산으로의 여정: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사항들'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디지털 환경에서도 고객이 자산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은행이 기존 금융에서 쌓은 자산관리와 내부통제 경험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하고, 외부 사업자와 함께 디지털 가치의 발행과 유통을 연결하는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이 부장은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은행이 준비자산 관리와 자금세탁방지(AML)를 담당하는 이른바 '신뢰의 레이어(Trust Layer)'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코인 가격보다 중요한 '준비자산'…왜 은행 역할이 거론되나

지난 28일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Next Finance Korea 2026’ 컨퍼런스에서 이상률 KB국민은행 DT추진부장이 발표를 하고 있다. / KB국민은행 제공

디지털자산 가운데 은행과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분야는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나 원화 등 특정 통화의 가치에 연동하도록 설계한 디지털자산으로,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현금이나 국채, 은행 예금 등 준비자산을 보유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발행 규모가 커질수록 준비자산을 어디에 보관하고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중요해진다. 이용자가 대규모 환매를 요구했을 때 실제로 지급할 자산이 충분한지, 준비자산의 가치와 유동성이 안정적인지가 스테이블코인의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올해 5월 말 기준 약 3200억달러 규모까지 성장했다. 아직 전체 은행 예금과 비교하면 작은 수준이지만, 주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보유한 미 국채 등 준비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금융시장과의 연결도 강해지고 있다.

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도 은행의 가상자산 익스포저 기준에서 준비자산의 질과 유동성을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 통화에 연동된 가상자산의 경우 준비자산이 시장·신용 위험이 낮아야 하고, 환매 요구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현금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은행권에서 디지털자산을 단순한 투자상품이 아닌 자산보관과 결제, 준비자산 관리 문제로 접근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국내 규제도 '거래'에서 '시장 구조'로 확대

지난 28일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Next Finance Korea 2026’ 컨퍼런스에서 서기원 KB국민은행 경영기획그룹 부행장이 발표를 하고 있다. / KB국민은행 제공

국내 디지털자산 제도 역시 거래소 이용자 보호를 넘어 발행과 유통, 사업자 내부통제 등 시장 전체 구조를 다루는 방향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3월 가상자산위원회를 열고 '디지털자산기본법'으로 불리는 가상자산 2단계 법제의 정부 검토안을 논의했다. 거래소 내부통제와 손해배상 책임, 디지털자산 시장의 발행·유통 구조 등이 논의 대상에 포함됐다. 다만 스테이블코인의 구체적인 발행 주체나 거래소 지배구조 등 세부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금융위는 설명하고 있다.

자금세탁방지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지난 8월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특정금융정보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가상자산 이전 시 적용되던 트래블룰의 100만원 기준을 없애고 해외 가상자산사업자나 개인지갑과의 거래에 위험도에 따른 관리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겼다. 고객확인 의무와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심사 기준도 보다 구체화됐다.

트래블룰은 가상자산을 전송할 때 송·수신인의 정보를 사업자 간에 확인하도록 하는 제도다. 은행 송금에서 자금의 출처와 수취인을 확인하는 것처럼 가상자산 거래에서도 자금 흐름을 추적해 자금세탁이나 범죄자금 이동 가능성을 줄이려는 취지다.

KB국민은행이 이번 행사에서 준비자산 관리와 자금세탁방지를 은행의 주요 역할로 언급한 것도 국내외 규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예금도 토큰으로'…은행권 디지털자산 경쟁 범위 넓어진다

지난 28일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Next Finance Korea 2026’ 컨퍼런스에서 서기원 KB국민은행 경영기획그룹 부행장이 발표를 하고 있다. / KB국민은행 제공

은행이 참여하는 디지털자산 영역은 스테이블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 은행 예금을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디지털 토큰 형태로 구현하는 '예금토큰'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예금토큰의 실제 활용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국고보조사업에 예금토큰을 활용하는 실험을 발표했으며, 7월에도 프로젝트 한강을 디지털화폐 관련 주요 사업으로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예금토큰과 스테이블코인은 비슷해 보이지만 구조에는 차이가 있다. 예금토큰은 기본적으로 은행 예금을 디지털 형태로 구현하기 때문에 기존 은행 규제와 지급결제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별도의 발행사가 준비자산을 기반으로 발행할 수 있어 발행자 규제와 준비자산 관리, 환매 구조가 핵심 쟁점이 된다.

BIS도 토큰화 예금과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준비자산의 구성과 결제 구조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이 은행 예금으로 집중될 경우 개인 예금이 소수 발행사의 대규모 예금으로 이동하면서 은행의 자금조달 구조에도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디지털자산 시장 확대는 은행에 새로운 상품 하나를 추가하는 차원을 넘어 결제와 자산보관, 자금세탁방지, 준비자산 관리 등 기존 금융 인프라의 역할을 디지털 환경에서 다시 설계하는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이 과정에서 기존 금융업에서 축적한 신뢰와 관리 역량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패러다임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다가오는 디지털자산 시대에도 고객의 선택을 받는 금융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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