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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북안동의 부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용환(1887~1946) 선생의 80주기다. 그는 1946년 7월 10일,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평생 '집안을 말아먹은 노름꾼'이라는 손가락질 받았던 그의 진짜 정체는 사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안동의 명문가인 의성 김 씨 종가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한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자 대쪽 같은 선비 정신을 이어온 집안에, 전무후무한 ‘파락호(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장손 김용환이었다.
선생의 노름벽은 안동 일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노름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 손을 잡으며 "이제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타짜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다.
가문의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오래도록 쌓아온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내려 오던 전답 18만평도 노름빚으로 인해 모두 팔렸다. 현재 시가로 약 200억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나중에는 사당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릴 지경이었다. 문중 자손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어 김용환이 팔아먹은 전답을 다시 종가에 사주곤 했다.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집안 재산을 거덜 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 오라고 시댁에서 딸에게 준 돈마저 가져갔다. 딸은 신행날을 받았지만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없어,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태우기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은 김용환에 대해 수군거리고 비난했고,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처럼 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김용환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몇 해 뒤, 추악한 난봉꾼의 가면 뒤에 숨겨진 거룩한 진실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그가 도박으로 탕진했다던 그 막대한 재산은 단 한 푼도 노름꾼들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돈은 일제의 숨 막히는 감시망을 뚫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들의 군자금으로 고스란히 수송되고 있었다.
김용환이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그는 할아버지 김흥락이 일본 헌병 앞에서 무릎꿇림을 당하는 치욕적인 현장을 보게 됐다. 헌병은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면서 할아버지를 사정없이 다그쳤다. 어린 김용환은 그 장면을 보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경북 북부 지역의 핵심 지도자로서 안동 지방의 의병을 이끌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답게 문경 등지에서 활약한 이강년, 김상태가 이끄는 의병 부대에 참여했다.
30대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했다. 의용단은 만주 길림의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에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위해 영남 지방 인사들이 결성한 조직체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인 안동, 영천, 군위, 창녕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해왔는데, 대다수의 부호는 친일파였기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김용환은 1922년 12월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의용단원 36명과 함께 체포돼 투옥된다.

이후 그가 살아갈 방법은 철저한 위장밖에 없었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위장한 뒤, 모인 돈을 모두 만주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런 활동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 노릇을 했던 김용환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임종 무렵에 그의 독립군 동지가 "이제는 사실을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권유했다. 그는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며 끝내 입을 다문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숨은 헌신은 3년상이 끝난 1948년, 아름아름 세상에 알려졌고, 대한민국 정부는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경상도 방언으로 아버지) 참봉 나리'라는 편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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