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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밖으로 나온 백제 왕비…공산성의 밤이 무대가 됐다 [TF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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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피해자들이 제 발로 찾아간 건물 안에 있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을 공포에 몰아넣은 부녀자 연쇄살인범은 피해자들이 진료를 받으러 들른 빌딩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동안 '엽기토끼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듬해 같은 동네에서 벌어진 납치미수 사건과 범인이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찰이 진범으로 지목한 인물이 납치미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교도소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엽기토끼 사건의 범인은 따로 있었던 셈. 그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국내 1호 탐정으로 알려진 임병수 탐정이 신정동 사건의 진범이 오랫동안 수사망을 빠져나간 이유를 최근 유튜브 채널 '뷰인사이드'에서 분석했다.
첫 번째 사건은 2005년 6월 6일 일어났다. 감기 증세로 병원에 가던 20대 회사원 여성이 사라졌다. 여성은 신정동 한 초등학교 뒤편 골목의 쓰레기 무단 투기 장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각각 쌀 포대에 씌워진 채 끈으로 묶여 있었다. 사인은 목이 졸려 숨진 경부압박 질식사였다. 몸 곳곳에서 심한 폭행 흔적도 나왔다.
5개월 뒤인 같은 해 11월 20일 두 번째 사건이 벌어졌다. 친정에 간다며 집을 나선 40대 여성이 연락이 끊겼다. 여성은 신정동 주택가 골목에서 비닐과 돗자리에 싸인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과 결박 방식이 첫 사건과 비슷해 경찰은 같은 범인의 짓으로 봤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현장 증거물에서 범인의 유전자 정보(DNA)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건은 그대로 장기 미제로 남았다.
이 사건이 '엽기토끼 사건'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건 이듬해 같은 동네에서 벌어진 납치미수 사건 때문이다. 한 여성이 2006년 5월 신정동 거리에서 흉기로 위협당해 반지하 집으로 끌려갔다. 여성은 범인이 한눈을 판 틈에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여성은 집 안에 또 다른 남성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바닥에 끈이 잔뜩 널려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여성은 도망치다 숨었던 윗집 신발장에 토끼 캐릭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 사연이 201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세 사건을 모두 같은 2인조의 범행으로 여기게 됐다. 2005년 살인사건까지 '엽기토끼 사건'으로 불린 이유다.
실마리는 DNA에서 풀렸다. 경찰은 2016년과 202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증거물 재감정을 맡겼다. 발전한 기술 덕에 두 살인 사건 증거물에서 같은 남성의 DNA가 나왔다. 문제는 그 DNA의 주인을 찾는 일이었다. 경찰은 동일 수법 전과자와 신정동 전출입자 등 23만1897명을 수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가운데 1514명의 DNA를 채취해 대조했다. 국제공조수사까지 벌였지만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사팀은 범인이 이미 숨졌을 가능성으로 눈을 돌렸다. 사망자 56명을 추린 끝에 범행 당시 신정동 빌딩에서 관리인으로 일한 장모씨가 떠올랐다. 장씨는 2015년 7월 암으로 숨졌다. 시신도 화장돼 DNA를 얻기 어려웠다. 경찰은 경기 부천·광명·시흥 일대 병원 40곳을 뒤진 끝에 장씨의 검체를 보관하던 병원을 찾아냈다. 국과수 감정 결과 이 검체와 사건 증거물의 DNA는 일치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는 지난해 11월 장씨를 진범으로 특정했다.
장씨는 병원 진료를 받으러 온 피해자들을 건물 지하로 데려가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빌딩 지하에서는 피해자 시신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흙·곰팡이 성분과 노끈이 발견됐다. 다만 장씨가 숨진 탓에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끝났다.
문제는 장씨가 엽기토끼 사건의 범인일 수 없다는 사실ㅇ 수사 과정에서 확인됐다는 점이다. 장씨는 같은 건물에서 또 다른 여성을 지하로 끌고 가 성폭행하려다 2006년 2월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2009년까지 교도소에 있었다. 석 달 뒤 엽기토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장씨는 수감 중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두 사건이 범인이 다른 별개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 엽기토끼 사건은 공소시효마저 끝나 범인을 찾아도 처벌할 수 없다.
임 탐정은 장씨가 늘 건물에 있던 사람이라는 점이 오히려 의심을 피하게 했다고 봤다. 임 탐정은 "전형적인 생활권 범죄자는 근무지 근처에서 범행하고 시신도 근처에 버려 쉽게 잡힐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늘 거기 있는 사람이라 용의선상에서 빠르게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건물 관리인은 신뢰와 공간 접근권을 동시에 갖는다"고 말했다.
사는 곳도 수사망을 벗어나게 했다. 장씨의 근무지는 신정동이었지만 실제 집은 부천이었다. 당시 수사는 신정동 주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엽기토끼 사건과 한데 묶어 본 시선도 걸림돌이었다. 임 탐정은 "엽기토끼 사건과 묶어서 보다 보니 그 범인과 이 범인이 같을 것이라는 확증편향이 생겼다. 결국은 장씨의 단독 범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엽기토끼 사건의 2인조는 누구일까. 임 탐정은 "직장 선후배나 교도소 동기처럼 같은 집단에 속해 비밀을 지키기 쉬운 관계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 다른 범인이 한 동네에 몰린 이유를 동네 환경에서 찾았다. 임 탐정은 "인적이 끊기는 심야 동선과 가로등이 없는 길, 관리되지 않는 건물 때문에 모방범죄가 아니더라도 그런 범행을 저지를 가해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
임 탐정은 생존자가 기억한 신발장과 건물 내부 구조를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해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20년이 지나면 공범 관계에서 뭔가 틀어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제보다"라고 말했다.
임 탐정은 "유족들은 20년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왜 그랬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분들에게는 사실상 전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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