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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마라톤 대회가 코스 위 응급 대응을 맡길 의료진을 보수 없이 모집하면서 이들을 직접 보장하는 상해보험에는 가입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회 측은 의료진이 다치거나 숨져도 주최 측 과실이 인정돼야 보상하는 영업배상책임보험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의료진의 선의에 기대 응급 대응 공백을 메우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2026 인천마라톤 측은 최근 대회 공식 SNS에 '레이스 메딕' 모집 안내문을 올렸다. 안내문은 "레이스 메딕은 멈춰 있는 구급차가 아니다. 코스 위에서 러너들과 완벽히 동일한 호흡으로 질주하며 예기치 못한 한계와 응급 상황을 가장 먼저 통제하는 달리는 응급실"이라고 소개했다. "수만 명의 러너들이 무사히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곁에서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인천마라톤의 수호자"라는 문구도 붙였다.
지원 자격은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 면허 소지자다. 지원 코스의 완주 기록을 증빙하거나 그에 준하는 주력을 갖춰야 한다. 대회 측이 진행하는 레이스 메딕 교육도 이수해야 한다. 모집 코스는 풀코스와 10km다. 풀코스는 예상 완주 시간대별 8개 그룹에서 5명씩 40명을 뽑는다. 10km에서는 5명을 뽑아 모두 45명이다. 모집 기간은 '추후 공개'다. 대회 공식 크루인 러너스 부스트 크루를 모집할 때 함께 진행한다고만 밝혔다.
제공 혜택은 각 코스 참가자 패키지와 같다. 번호표, 대회 공식 티셔츠, 완주 메달, 타월, 양말, 블랭킷, 에너지젤, 마스크팩이다. 안내문에는 별도의 활동비나 수당 지급 여부, 보험 가입 및 책임 범위 등은 명시되지 않았다. 대회 측은 "본 게시물은 사전 안내"라며 "정확한 모집 일정 및 상세한 접수 방법 등은 추후 공식 SNS와 홈페이지를 통해 다시 안내할 예정"이라고만 적었다.

2026 인천마라톤은 다음 달 22일 오전 8시에 열린다. 풀코스 8000명, 10km 1만 명, 4.5km 2000명 등 모두 2만 명이 달린다. 풀코스는 영종구 운서역 일원에서 출발해 인천아시아드 주경기장으로 들어온다. 참가비는 풀코스 8만 원, 10km 5만 원, 4.5km 3만 원이다. 인천시와 대한육상연맹이 주최하고 인천시체육회와 인천시육상연맹이 주관한다. 대회 운영은 동아일보사와 스포츠웨이브가 맡는다.
운영사인 동아일보사는 이달 20대 러너가 숨진 ‘2026 서울레이스(서울달리기)’를 서울시와 함께 주최한 바 있다. 지난 11일 이 대회 하프코스에 출전한 20대 여성 A 씨가 결승선을 500m가량 남긴 종각역 인근 청계천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A 씨는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병원으로 옮겨졌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12일 오후 끝내 숨졌다.
서울레이스 참가 유의사항에는 "사망, 상해, 기타 보험은 개인보험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조직위원회가 가입한 보험은 참가자를 직접 보장하는 상해보험이 아니었다. 주최 측 과실이 인정돼야 보상하는 영업배상책임보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운영사가 맡은 대회가 의료진의 '선의'에 기대는 모집 안내를 내놓자 곱지 않은 시선이 나온다. 한 네티즌은 "최근 마라톤 대회에서 사망 사고까지 발생하니 주최 측에서는 책임은 지기 싫고 비용도 쓰기 싫어서 공짜로 뛰면서 책임까지 대신 져 줄 의료진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며 "응급의료체계를 제대로 구축하려면 전문 의료 인력과 장비, 구급차, 이송체계에 충분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 네티즌은 "의료진의 마라톤 완주 기록을 요구할 게 아니라 보수 지급 여부, 응급 상황에서의 역할과 책임 범위, 사고 발생 시 법적 책임과 보험 문제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며 “'달리는 응급실'이라는 그럴듯한 홍보 문구로 의료진의 선의에 기대 주최 측의 비용과 책임을 떠넘기려는 건 아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무국 관계자는 "기존 마라톤 대회의 페이스메이커나 주로를 지키는 레이스 패트롤처럼 자원봉사 성격으로 기획된 것"이라며 "평소 달리기에 관심이 많고 출전 의사가 있는 의료진 러너들이 코스 위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안전을 살펴준다면 의미가 크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안전 관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원봉사 인력을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관계자는 "다른 마라톤 대회와 마찬가지로 코스 거점마다 구급차와 전문 의료진은 기존 계획대로 정상 배치된다"며 "안전 예산을 아끼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코스 환경의 특수성 때문에 레이스 메딕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이번 코스에는 장거리 교량인 청라하늘대교 구간이 포함돼 있다"며 "다리 위는 지리적·공간적 한계로 구급차나 의료 인력을 촘촘하게 대기시키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응급 상황은 몇 초 차이의 초기 대응(골든타임)이 생명을 가르는데 레이스 메딕이 코스 위에서 함께 달리고 있다면 구급차가 진입하기 힘든 구간에서도 신속하게 초기 대처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장 장비 지원에 대해서는 "주최 측에서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지급할 예정이며 타박상이나 긁힘 등 가벼운 찰과상 사고에 대비할 수 있는 상비약품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활동비 지급이나 처우와 관련해서는 자원봉사의 취지를 재차 강조했다. 관계자는 "보수를 지급하는 순간 순수한 자원봉사의 취지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어 기존 봉사 크루들과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했다"며 "페이스메이커 역시 개인 최고 기록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대를 지키며 달리는 것처럼 비슷한 개념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레이스 메딕이 활동 중 다치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의 보험 적용에 대해 관계자는 "일반 참가자와 동일하게 영업배상책임보험으로 일괄 처리할 예정"이라며 "메딕이라고 해서 별도의 상해보험이나 추가 특약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의료진 개인의 상해나 사망을 직접 보장하는 상해보험에 가입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마라톤 대회는 특성상 보험사에서 상해보험 가입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가입을 받아주는 보험사가 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사무국 설명처럼 마라톤 대회는 상해보험 가입 문턱이 높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2009년 실손의료비 제도 개편 이후 마라톤 전용 특약은 대거 축소되거나 판매가 중단됐다. 대규모 대회의 심정지 같은 질병사망 담보는 손해율이 높다. 이 때문에 보험사들은 인수 심사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단체상해보험을 들려면 개인별 명단과 식별정보도 필요하다. 이에 따라 참가자를 직접 보장하는 상해보험 대신 주최 측 과실이 인정돼야 보상하는 배상책임보험에만 가입하는 대회가 많다.
해외 마라톤에도 의료진이 참가자와 함께 달리는 제도가 있다. 다만 주최 측이 따로 갖춘 의료·구호 체계를 보조하는 역할로 선을 긋는다.
독일 함부르크 마라톤은 '메디컬 러너' 제도를 운영한다. 대상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의사와 의료 자격을 갖춘 인력이다. 이들은 기본 응급처치 장비를 넣은 러닝 배낭에 눈에 띄는 깃발을 꽂고 주자들 사이에서 달린다. 이상이 생긴 주자를 발견하면 자격 범위 안에서 응급처치를 한다. 필요하면 의료 본부에 연락하고 추가 지원 인력이 올 때까지 현장을 지킨다. 대회 측은 메디컬 러너가 기존 의료 안전 대책을 보완하는 역할이며 의료 처치 책임은 정규 구급·구조대에 있다고 명시했다. 메디컬 러너에게는 무료 출전권과 참가 티셔츠를 준다. 이 제도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마라톤의 '러닝 닥터'를 본떠 만들었다.

체코 프라하 마라톤 등을 운영하는 런체크도 '러닝 닥터'를 둔다. 마라톤 대회 하나에 최대 8명을 두고 달리는 속도에 따라 코스 곳곳에 나눠 배치한다. 런체크는 러닝 닥터가 기존 의료·안전 체계를 강화하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이들이 필요한 의료 장비를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참가자들에게 미리 알린다. 러닝 닥터에게도 무료 출전권과 티셔츠가 주어진다.

일본에서는 '메디컬 러너'가 지역 대회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27일 열린 홋카이도 오호츠크 아바시리 마라톤은 의사, 간호사, 구급구명사 면허 소지자 25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했다. 대회 측은 이들의 참가비를 면제했다. 여비와 사례금은 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구호 활동으로 레이스를 멈춰도 기록 계측은 계속되지만 관문 통과 시간에 늦으면 따로 구제하지 않는다. 오사카 요도가와 시민마라톤은 참가비 면제나 사례금 없이 의료 자격을 가진 참가자를 메디컬 러너로 등록받는다. 이 대회 역할은 구호가 필요한 주자를 발견했을 때 가능한 범위에서 초기 대응을 하고 스태프에게 알리는 것이다. 주최 측은 메디컬 러너도 일반 러너와 같은 상해보험에 가입한다고 명시했다.
대형 대회는 코스 구호를 전담 조직에 맡긴다. 지난 3월 1일 열린 도쿄마라톤 2026에는 1회 대회부터 구호를 맡아 온 고쿠시칸대 구호팀 234명이 투입됐다. 코스를 이동하며 대응하는 모바일대 24개 팀 48명과 기본소생술(BLS)대 40개 팀 80명이 포함됐다. 의사 4명과 구급구명사·간호사 55명도 함께했다.
서울레이스 사고 뒤 의료계는 대회 응급의료 체계를 법령에 구체적으로 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에 마라톤 등 달리기 대회의 안전관리를 강화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1일 국회를 통과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의 하위법령을 만들 때 의료진 배치와 자동심장충격기(AED) 확보 같은 응급의료 대비책을 대회 안전관리계획에 구체적으로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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