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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기 많던 가족 휴양지였는데”… 5월 한 달 만에 관광객 51.2% 급감한 여행지

위키트리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봉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특정 정당의 깃발도, 무대 위에서 군중을 지휘하는 뚜렷한 지도부도 없다. 그런데도 주말마다 수만 명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위키트리는 이 광장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보고 여섯 차례에 걸쳐 들여다본다. 어느 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이유로 모였는지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다.>
저녁 6시. 송파의 한 회사에서 퇴근한 30대 박사 출신 직장인이 차를 몰고 올림픽공원으로 향한다. 그가 자리를 펴는 곳은 무대 앞이 아니다. 경기장 한쪽 그늘에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수학·과학 무료 과외'라고 적힌 작은 안내판을 올려둔다.

지난 2월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용인에 살면서 송파의 회사에서 퇴근해 잠실에 들렀다가 다시 용인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매일 반복한다.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계단과 벤치에서 문제집을 펴든 학생들을 가르친다. "돌아다니다 보면 계단에 앉아 문제를 풀고 벤치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꽤 있어요. 그런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평일에는 고등학생이, 주말에는 초등학생이 많이 온다고 했다. 다음 날에도 나오느냐고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비 안 오면 나옵니다."
잠실 봉쇄 시위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에서는 이 광장을 '보수 시민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평가한다. 깃발도 조직도 동원도 없이 2030이 알고리즘을 따라 모여 스스로 물류와 안전과 정보를 운영한 광장. 한국 시위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한철 현상'으로 본다. 실제로 초반 시위를 주도한 청년 참여가 줄고 있다는 우려가 현장에서 나온다. 위키트리 연재의 마지막 회는 그 평가의 자리다. 무엇이 새로웠고 무엇이 한계였을까. 그리고 잠실 이후 한국의 광장은 어디로 향할까.

광장의 부침은 시계열 데이터로도 드러난다. 시위 사흘째인 지난달 5일 밤 핸드볼경기장을 둘러싼 인간띠가 처음 형성되며 야간 피크 인원이 6000명을 넘었다. 개표소 전면 봉쇄가 시작된 것도 이때다. 이틀 뒤인 7일 일요일에는 공원 체류 인원이 3만 2000명, 집결 인원만 따져도 최대 2만 명에 이르렀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처음 터진 대규모 주말 집결이었고, 현장을 채운 것은 주로 2030이었다. 그러나 9일 오전 집계 인원은 200명대로 내려앉았다. 이틀 만에 16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조직이 동원하는 집회라면 이런 격차는 나오기 어렵다. 주최 측이 평일 인원을 유지할 수단과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주말에 다시 모이는 이 패턴이 오히려 자발적 참여 구조를 보여주는 방증이 됐다.
이때부터 광장을 지키는 소수와 주말마다 다시 채워지는 다수가 나뉘는 상주 농성 형태가 자리를 잡았다. 열흘째로 접어든 13일 오후 7시 인원은 1만 2000명으로 최고점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풍경은 오히려 안정돼 있었다. 갓난아이를 안은 부부와 사춘기 자녀의 손을 잡은 부모 등 가족 단위 참가자가 눈에 띄게 늘었고 푸드트럭과 에어컨 쉼터가 들어섰다. 단체 대화방에 '몇 번 게이트 식수 부족'이라는 한 줄이 오르면 그 글을 본 시민이 배달 앱으로 물을 주문해 현장으로 보냈다. 평일 평균 인원은 지난달 중순부터 말까지 하루 8233명씩 순증했다. 모기장과 텐트를 활용한 장기 농성이 고착되면서 광장은 '찾아오는 곳'이자 '머무는 곳'으로 바뀌었다.
현장의 머릿수만이 아니다. 온라인의 관심도 이 사안의 무게를 보여준다. 소셜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썸트렌드로 지난 한 달간 뉴스·커뮤니티·블로그·인스타그램의 언급량을 분석한 결과, '잠실개표소' '올림픽공원' '선관위' 등 이번 사태 관련 키워드의 버즈량은 '월드컵' '손흥민' '홍명보' 등 2026 북중미 월드컵 관련 키워드와 견줄 만한 수준이었다.
한국의 첫 경기인 체코전이 열리기 전인 지난달 3일부터 9일까지는 이레 내내 잠실 관련 언급량이 월드컵을 앞질렀다. 사태 이튿날인 지난달 4일 관련 언급량은 하루 3만 7526건으로, 같은 날 월드컵 언급량의 세 배에 가까웠다. 12일 체코전 승리로 스포츠 언급량이 하루 11만 건대로 치솟은 뒤에는 월드컵이 온라인 대화를 압도했지만, 잠실 관련 언급은 경기가 없는 날에도 하루 수천에서 1만여 건을 오르내리며 사그라들지 않았다. 지난달 한 달 전체로 보면 이번 사태 관련 언급량은 47만여 건, 월드컵 관련 언급량은 112만여 건이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린 국제 스포츠 이벤트의 40%를 웃도는 관심이 잠실 광장에 쏠린 셈이다.

이 광장에서 가장 상징적인 단어는 '민주화'였다. 소셜미디어에서 일부 청년은 이 시위를 '잠실민주화운동'이라 불렀다. 1980년대 항쟁으로 이미 민주화가 이뤄졌는데 무슨 소리냐며 헛웃음을 짓는 기성세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에게 민주화는 더 이상 특정 세대의 훈장이 아니었다.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사람의 권리를 묻고 국가기관의 절차를 의심할 자유를 요구하는 것도 민주주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도 민주주의를 안다.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선언에 가까웠다. 진보의 자산으로 여겨지던 민주화의 기억이 진보 정권을 향한 비판의 동력으로 호명되는 풍경. 한 세대의 도덕적 권위가 다음 세대에게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분노를 표현하는 언어도 낯설었다. '부정선거'라는 단어를 끝내 피하고 '신뢰' '시스템' '절차' '참정권' 같은 단어를 고른 청년이 적지 않았다. 오랫동안 진보 진영이 즐겨 써 온 언어들이다. 진보의 언어였던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진보 정권 아래에서 다른 방향으로 호명하는 세대의 등장. 이것이 잠실이 남긴 가장 또렷한 새로움이었다. 이들은 기성 보수 집회의 상징도 의도적으로 피했다. 전문 시위꾼 스타일의 팻말 대신 손그림 태극기를 들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특정 조직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물론 광장이 단일한 색을 띤 것은 아니다. 'STOP THE STEAL' 문구와 태극기가 등장했고, 부정선거를 주장해 온 일부 보수 인사와 유튜버도 오갔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올림픽공원을 두고 "민주주의의 성지가 됐다"고 했고, 사전투표 폐지와 제9회 지방선거 전면 무효·재선거를 요구했다. 광장은 '참정권을 말하는 2030'과 '부정선거를 확신하는 기성 우파'가 한자리에 뒤섞인 공간이었다. 두 흐름은 같은 구호를 외쳤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 운동의 가장 큰 한계는 그 출발점이 된 의혹의 진위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해서 이들이 제기하는 의혹이 모두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확인된 사실관계는 이렇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가 중단된 투표소는 전국 26곳, 가장 길게 멈춘 곳은 송파구 잠실2동 제2투표소로 105분간 중단됐다. 유권자 수의 절반에 못 미치는 투표용지가 인쇄된 투표소는 전국 1천 371곳에 달했다. 선관위는 대국민 사과와 수뇌부 사퇴·직위해제로 대응했고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다. 검·경은 합동수사본부를 꾸렸고 법원은 일부 증거보전 결정을 내렸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선거소청을 제기했다. 광장이 요구한 '당일 개표 수개표'나 '투표지 공개'는 별도의 제도적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고, 정부와 선관위는 일부 의혹에 대해 "음모론"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운동의 동력이 된 확신과 그 확신을 뒷받침할 증거 사이의 거리는 아직 좁혀지지 않았다.
무조직성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동원이 없으니 일당 의혹도 일지 않았지만, 잘못이 생겨도 책임을 물을 주체가 없었다. 봉쇄로 빚어진 체육단체 업무 마비나 유소년 선수 소지품 수색 같은 논란 앞에서 이를 조율하고 멈춰 세울 중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는 광장 안에서도 나왔지만, 그것을 현장의 결정으로 옮길 통로는 끝내 마련되지 않았다.
광장 밖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번 사태에 반응한 청년들도 있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 직후 전국 주요 대학 학생회의 규탄 성명이 빠르게 쏟아졌다. 그러나 일부 대학생은 성명에 동참하면서도 별도의 목소리를 냈다. 참정권 침해가 중대한 문제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 사태를 이끄는 흐름의 일부와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이들이 던진 질문은 하나였다.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한 참가자는 "총학생회들이 성명에서 말하는 것이 투표용지가 모자라지 않은 사회입니까.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고 했다. 이들이 짚은 것은 반응의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안에서는 반페미니즘·소수자 혐오 정서가 확산하고 '탈정치'라는 명분으로 학생 자치가 위축됐다. 청소·경비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문제에는 소극적이던 학생들이 참정권 침해에는 집단적으로 빠르게 목소리를 냈다. 한 참가자는 이를 "정의감은 있지만 감수성은 없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잠실 안의 청년들은 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광화문을 채웠던 촛불 세대였다. 한 20대 참가자는 목소리에 날을 세워 말했다. "12·3 계엄 시위 때 아이돌 응원봉 들고 노래 부를 때는 나갔잖아요. 그때는 안 다칠 것 같으니까 또 재미있으니까 나간 거 아닙니까. 지금은 왜 안 나오나요. 참정권이 훼손됐는데 왜 조용한가요." 그는 촛불 시위는 언론이 조명하고 참여가 '상식적인 시민'의 표식처럼 여겨진 반면 잠실에는 '극우 집회'라는 프레임이 먼저 붙었다고 했다. "촛불 때는 나가도 욕 안 먹잖아요. 여기 나오면 부정선거론자 소리 듣고. 그 차이가 언론이 어떻게 프레이밍하느냐의 차이 아닙니까." 두 시위의 성격이 다른 만큼 그의 분노가 과녁을 정확히 겨눈 것이냐는 따져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 목소리가 드러내는 것은 있다. 어떤 광장은 정당하고 어떤 광장은 의심받는다는 불만이다.

3주를 넘기자 광장의 언어가 이동했다. 시위 23일째인 지난달 27일 토요일 오전 인원은 1만~1만 2000명으로 2주 전 주말과 비슷했지만, 태극기 옆에 성조기가 함께 등장했고 '부정선거'가 광장의 지배적인 구호로 자리 잡았다. 초기에 "부정선거라는 말은 잘 모르겠다"거나 선거 관리 체계를 점검하자던 온건한 목소리는 이 무렵 흐릿해졌다. 한 달째로 접어든 7월 1일, 야간 집결을 대기하는 상주 인원은 수백 명 수준으로 내려왔다. 경찰은 이 시점까지 139명을 특수강요 등 혐의로 수사하고 있었다. 상주 인원만 보면 시위가 자연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의 사법 압박이 동시에 강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소진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열기가 억제된 것인지 소진된 것인지, 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소속감을 거부하는 '클라우드형 개인'의 연대는 빠르게 모이는 만큼 빠르게 흩어질 수도 있다. 조직이 없다는 것은 동원이 없다는 강점인 동시에, 열기가 식기 시작하면 그것을 다시 지필 중심이 어디에도 없다는 약점이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시위 현장 인근을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과 충돌 없이 평화시위를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온라인에서는 침묵시위 제안이 공유됐다. 충돌을 피하려는 이 자기 절제가 역설적으로 이 광장의 가장 큰 자산일지 모른다. 동원된 군중이었다면 통제에 지휘부가 필요했겠지만, 스스로 모인 개인들은 스스로를 단속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이 시위가 특정 정당의 정치적 자산으로 흡수되느냐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현장을 방문해 환영받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내쫓기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무당파를 자처하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불편함이 새어 나왔다. "이게 특정 당 집회가 되면 안 된다"는 우려가 일부의 발걸음을 뜸하게 만들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렇다면 잠실은 보수 시위의 새로운 패러다임인가. 답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광장은 지난 10여 년간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났다. 2016~2017년 촛불집회는 거대한 조직과 무대가 결합한 대규모 동원의 정점이었고, 그 맞은편의 이른바 '태극기 집회'는 고령층이 주축이 된 결집의 상징이었다. 두 광장 모두 뚜렷한 주최 측과 지도부가 있었다. 잠실은 그 어느 쪽과도 닮지 않았다. 참여층은 촛불의 4050도, 태극기의 고령층도 아닌 2030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진영의 탄생으로 보기엔 이르다. 광장의 청년 다수는 스스로를 보수로 규정하기를 거부했고, 자신을 보수라 밝힌 이조차 "특정 정당을 무조건 지지한다기보다 법치주의와 절차를 중요하게 본다"고 했다. 이들의 분노가 보수 정당 지지로 곧장 전환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 세대는 양 진영 모두에 거리를 둔 채 사안별로 움직이는 '쟁점 중심의 개인'에 가까웠다. 절차의 투명성을 말하는 쪽과 결과의 전복을 말하는 쪽이 언제까지 한 광장에 공존할지, 아니면 어느 순간 갈라설지도 잠실 이후를 가를 변수다.
잠실의 광장은 한국 보수 시위의 오래된 이미지를 일부 갈아치웠다. 동시에 부정선거를 단정하는 목소리와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의혹, 책임 주체의 공백이라는 그늘도 함께 안고 있었다. 이 광장이 새로운 표준이 될지 한 시절의 풍경으로 남을지는 진행 중인 수사와 조사의 결론, 그리고 흩어진 '해시태그 세대'가 다음에 또 모일지에 달려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하다. 잠실의 청년들은 누구에게도 동원되지 않은 채 제 발로 나왔고, 누구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광장을 운영했으며, 진영의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기를 거부했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 광장은 흔치 않다. 참정권이라는 단어가 2030의 일상어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청년은 정치에 무관심하다'거나 '거리의 정치는 동원의 산물'이라는 오래된 통념에 분명한 균열이 났다.
저녁이 오면 그 박사 출신 직장인은 다시 접이식 탁자를 편다. 누가 시키지 않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잠실 이후 한국의 광장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비만 오지 않으면 그는 또 이곳에 나올 것이다. / 김지현·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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