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터졌다…관객 수 늘더니 올해 다큐 영화 1위 찍은 뜻밖의 '한국 영화'

조용히 입소문을 타던 한국 다큐멘터리 한 편이 극장가에서 뜻밖의 성적을 냈다. 대형 외화와 상업 영화들이 스크린을 장악한 가운데 이명세 감독의 시네마틱 다큐멘터리 영화 ‘란 12.3’이 누적 관객 수 25만 명을 돌파하며 올해 개봉 다큐멘터리 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화려한 스타 캐스팅도 거대한 제작비를 앞세운 블록버스터도 아니었다. 그러나 2024년 12월 3일 밤의 긴박한 기록을 스크린 위에 옮긴 이 작품은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관객 수를 늘리더니 올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

영화 '란 12.3' 메인 예고편 장면 중 일부. / 유튜브 '잇츠뉴 It'sNEW'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란 12.3'은 이날 누적 관객 수 25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를 통틀어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다큐멘터리 장르 중에서는 단연 1위의 성적이다. 대형 블록버스터 외화나 시리즈물, SF, 공포, 좀비물, 코미디 등 다채로운 상업 영화의 공세 속에서 이뤄낸 값진 결실이다.

이 영화는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의 긴박했던 현장 기록을 담고 있다. 독창적인 미장센으로 대표되는 시네아스트 이명세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시민 150여 명이 직접 제공한 영상 및 사진 자료, 국회 관계자들과 취재진의 기록 등 방대한 아카이브를 토대로 제작됐다. 여기에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 '덕혜옹주', '천문: 하늘에 묻는다' 등의 음악을 책임졌던 조성우 음악감독이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국회의장부터 고등학생까지…전국 극장가 흔든 'GV 열기'

영화 '란 12.3' 25만 관객 축하 포스터. / NEW 제공

관객들의 성원은 오프라인 현장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4월 24일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서울 4·3 영화제를 기점으로 영화 '란 12.3' 팀은 서울, 부산, 광주, 김해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함께 총 14차례의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했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김민석 총리 등 입법부와 행정부를 아우르는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특별 상영회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조명했는가 하면 배우 박중훈, 김의성, 이기영, 이원종과 변영주 감독 등 영화계 동료들도 GV 지원 사격에 나서 영화의 연출과 음악에 관한 깊이 있는 대담을 나눴다.

영화의 흥행 열기는 청소년들에게도 확산되는 흐름이다. 11일에는 전라남도 지역의 중·고등학생 및 교직원 1000여 명이 목포, 순천, 여수, 나주 등 4개 도시에서 단체 관람을 진행한다. 특히 CGV 목포평화광장 상영관에는 이명세 감독이 직접 참석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특별한 관객과의 대화(GV) 시간도 마련된다.

군인과 눈 마주친 찰나…그날의 96분 스크린으로

유튜브, 잇츠뉴 It'sNEW

이 작품은 2024년 12월 3일 밤 선포된 비상계엄령 발령 순간부터 이튿날 새벽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가결되기까지의 긴박했던 96분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영화의 예술적 시발점은 언론인 김어준 씨를 체포하기 위해 뉴스공장 스튜디오 앞에서 대기하던 군인의 시선과 위에서 비추는 카메라의 눈길이 마주치는 강렬한 순간이다. 이를 주목한 김어준 씨가 이명세 감독에게 그날의 사건을 영화로 영구히 남겨보자는 제안을 건넸고 본인이 직접 기획자 겸 투자자로 동참해 작품의 제작 기반을 마련했다.

설명 없는 다큐…오직 시각과 청각으로 만나는 그날 밤

영화 '란 12.3' 메인 예고편 장면 중 일부. / 유튜브 '잇츠뉴 It'sNEW'

기존의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문법과 달리 이 영화에는 관객의 해석을 제한하는 설명조의 내레이션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 당사자들의 사후 인터뷰 역시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명세 감독은 초기 영화사의 무성영화 연출 기법을 세련되게 차용해 철저히 가시적인 이미지와 공간적 음향, 긴장감 넘치는 자막, 그리고 특유의 강렬한 편집 리듬만을 사용해 관객을 그날 밤의 냉혹한 공기 속으로 즉각 동참시킨다.

특히 평온하던 시민들의 일상이 일순간에 정지하고 무장한 계엄군 병력이 헌법기관인 국회 진입을 시도하는 급박한 순간들을 실감 나게 연출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기법을 다수 활용했다. 계엄 세부 계획을 모의했던 군부 핵심 인사들의 패스트푸드점 밀실 모의 장면 등 실제 카메라가 가 닿지 못했던 은밀한 역사의 뒷골목은 정교한 애니메이션과 최신 AI 재연 기법을 결합해 독창적으로 직조해냈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청각적 요소 또한 매우 연극적이고 영화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조성우 음악감독은 인물들의 미세한 동작 변화나 화면의 움직임에 음향 효과와 음악 선율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미키마우징(Micky Mousing)' 기법을 도입했다. 주로 정교한 상업 극영화나 클래식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는 이 기법을 정통 다큐멘터리에 전격 도입함으로써, 날 것 그대로의 기록에 극적 서스펜스와 예술적 품격을 부여했다.

영화 '란 12.3' 메인 예고편 장면 중 일부. / 유튜브 '잇츠뉴 It'sNEW'

아울러 2024년 12월의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중간중간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비극적인 실제 기록 영상을 병치하는 과감한 시각 연출을 선보인다. 이는 과거의 상흔이 현재를 어떻게 일깨우고 이미 세상을 떠난 자가 살아있는 자를 어떻게 구원하는가에 대한 묵직한 시대적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을 사로잡은 시네마틱 다큐멘터리 '란 12.3'은 현재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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