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문명 속 익명인간... 야성의 유목동물로 자유를 그리다

말과 사슴이 무리 지어 화면을 가로지르고, 그 틈으로 흑백의 익명 인간들이 정처 없이 떠돈다. 40년 가까이 이 낯선 풍경을 그려온 화가가 이제 스스로 유목의 길 위에 선다.

허진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40여 년 화업을 집약한 개인전 '허진 정년퇴직 기념전 :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를 연다. 전시는 서울 광진구 능동로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내 세종뮤지엄갤러리 1·2관에서 오는 19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허진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40여 년 화업을 집약한 개인전 '허진 정년퇴직 기념전 :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를 연다. / 허 교수 인스타그램

허 교수는 내년 2월 정년퇴임한다. 이번 전시는 교육자이자 예술가로 걸어온 40년 가까운 시간을 한자리에 펼쳐 그의 창작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기록하는 자리다. 허 교수는 "40년 가까운 창작의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허 교수는 한국 남종화의 뿌리 깊은 화맥을 잇는 작가로 꼽힌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이자 호남 남종화의 시조인 소치 허련의 고조손이자 근대 남화의 대가인 남농 허건의 장손이다. 전남 진도군에 자리 잡은 소치의 운림산방 화맥을 5대째 잇는 동시에 그 전통에 머물지 않고 독창적인 현대 한국화의 길을 개척해왔다.

그 궤적은 '묵시', '다중인간', '현대인 이야기', '익명인간', '유목동물' 연작으로 이어진다. 화두는 하나로 관통된다. '인간에 대한 탐구'다. 허 교수는 수묵화의 전통적 미덕인 함축미에서 벗어나 서사적 미적 구조를 세우고, 채색화적 성격이 강한 표현으로 독특한 형상의 세계를 펼쳐 왔다. 전통이라는 중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세이자 한국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40여 년 화업을 집약한 개인전 '허진 정년퇴직 기념전 :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를 여는 허진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 허 교수 인스타그램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대표작 '유목동물' 연작이 놓인다. 역동적인 야생동물의 형상을 통해, 자본 문명에 젖어 기계적 삶에 예속된 현대인을 자연 본성에 가까운 자유의 세계로 이끌려는 시도다. 문명과 익명의 인간을 그린 화면 위로 실루엣의 점묘로 처리한 동물 이미지가 겹치고, 파편화된 현실이 강렬한 색채로 부각된다. 부유하는 흑백의 인간 군상과 문명의 산물들은 그 위를 떠돌며 기술 중심 문명의 허구성과 익명화된 인간의 피폐함을 드러낸다.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연작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서로 다른 동물을 합쳐 만든 기이한 이종융합동물의 형상으로, 유전자 조작과 재조합, 생명 복제, 세포 융합 같은 생명공학 기술이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교란할 위험을 경고한다. 인간과 자연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공동체는 '섬'으로 형상화됐다. 어린 시절 각인된 다도해 풍경에서 길어 올린 이 섬은 허균 '홍길동전'의 율도국이나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처럼, 지혜로운 공동체적 삶이 깃든 마음속 유토피아로 그려진다.

전시 제목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1970년 할리우드 영화에서 따왔다. 엘리엇 실버스틴 감독의 이 서부극은 아메리카 원주민 수족에게 붙잡힌 영국 귀족이 그들의 삶에 동화돼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이야기를 담았다. 허 교수는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 가운데 대표성을 띠는 것이 말이라는 데서 이 제목을 과감하게 가져왔다고 밝혔다. 이런 연상 작용은 포스터 디자인으로도 이어졌다. 허 교수는 메인 포스터의 제목과 디자인 스타일을 깊이 고민한 끝에 공간적이고 극적인 요소를 담아 드라마틱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주희 미술평론가는 이번 전시에 부친 평문에서 허 교수의 작업을 문명의 진행과 함께 나타난 '인간을 대체하는 인간, 환경을 대체하는 환경'에 누구보다 선제적으로 다가간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이 평론가는 그의 화면에서 화재와 화풍의 궤도를 예측하기 힘든 야성미를 읽으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초자연적 현상을 환유하는 그 태도를 마술적 리얼리즘과 맞닿아 있다고 봤다. 동양화라는 장르에 새로운 성정을 부여함으로써 예술적 생산성의 확장을 이뤄냈다는 것이 이 평론가의 진단이다.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라는 전시 제목은 그의 화면을 가로지르는 유목동물의 대표 이미지인 말을 떠올리게 한다. 문명에 갇히지 않고 초원을 내달리는 짐승의 자유가 곧 작가가 40년간 붙들어 온 화두였던 셈이다.

전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관람할 수 있다. 입장 마감은 전시 종료 30분 전이다. 오프닝 행사는 오는 21일 오후 5시에 열린다. 전시와 관련한 문의는 전남대학교 미술학과와 세종뮤지엄갤러리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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