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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잿빛 아연(亞鉛) 지붕은 오랫동안 화가와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준 도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역대급 폭염 속에서 그 낭만적인 지붕은 바로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오븐'으로 돌변했다.
유럽을 강타한 역대급 폭염으로 13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세계보건기구(WHO)가 28일(현지시각) 밝혔다. 이 가운데 프랑스에서만 약 1000명의 초과 사망이 발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AFP통신에 따르면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이날 X에서 "지난 21일 이후 유럽의 기록적인 폭염과 관련한 초과 사망자가 1300명 이상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초과 사망(excess death)은 과거 통계에 기반한 특정 기간 예상 사망자와 실제 발생한 사망자 수의 차이를 말한다.
테워드로스 사무총장은 "열 스트레스는 종종 '조용한 살인자'로 불린다"며 "유럽의 주거지와 직장, 학교는 이런 기온에 맞게 설계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럽인 시선이 쏠리는 곳은 프랑스, 그중에서도 수도 파리다. 파리는 폭염 사망자가 유독 많은 도시로 꼽혀 왔다. 2023년 의학 학술지 '더 랜싯 플래니터리 헬스'에 실린 연구에서 파리는 유럽 30개 수도 가운데 폭염 관련 사망 위험이 가장 높은 도시로 지목됐다.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이 도시 경관을 이루는 아연 지붕이다. 파리 지붕의 약 75~80%가 아연판으로 덮여 있다. 19세기 도시계획가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개조하던 시절, 복잡한 경사와 장식에 맞춰 가공하기 쉽고 값싸며 가벼운 소재로 아연이 대거 쓰였다. 그 정교한 시공 기술은 202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아연이 금속이라는 점이다. 열을 빠르게 흡수하고 전달하는 탓에 한여름 강한 햇볕 아래에서 지붕은 펄펄 끓는다. 그 바로 아래에는 과거 하인 방으로 쓰이던 다락방, 이른바 '샹브르 드 본(chambre de bonne)'이 자리한다. 파리에는 이런 형태의 주거가 11만3000여 채에 이르며, 일부는 면적이 약 9㎡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누가 이곳에 사느냐다. 두꺼운 석조로 보호받는 아래층 집을 구할 형편이 안 되는 학생, 사회 초년생, 저소득층이 주로 다락방에 산다. 월세는 저렴하지만 천장으로 열기가 그대로 내려오고, 창이 한쪽으로만 나 있어 맞통풍이 불가능하다. 밤에도 열이 빠지지 않는다.
주거 빈곤층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마이데르 올리비에 활동가는 "사람들은 파리의 지붕과 다락방을 낭만적으로 보지만, 실제로 그 방에 사는 이들은 비싼 월세를 내는 학생인 경우가 많다"며 "극심한 더위에 노출될 뿐 아니라, 밤에 열을 빼낼 맞통풍조차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치명적인 결과는 이미 통계로 확인된 바 있다. 약 1만50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2003년 폭염 당시, 프랑스 공중보건 당국 보고서에 따르면 지붕 바로 아래 다락방에 거주하는 것만으로 사망 위험이 4배 이상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붕 아래에 단열재를 넣고 환기를 개선하거나, 외부에 햇빛 차단 덧창을 다는 방법이 거론된다. 그러나 파리의 독특한 경관을 지키기 위한 규제가 발목을 잡는다.
올리비에 활동가는 "지붕을 보호하려는 규제 탓에 지붕에 단열 처리를 하거나 햇빛을 막는 덧창을 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 규제는 파리의 지붕은 보호하지만, 그 지붕 아래 사는 사람은 보호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사무실과 쇼핑센터, 영화관 등 현대식 건물에는 냉방 시설이 있지만, 오스만 양식 건물이 빼곡한 중심부의 일반 가정집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다는 점도 피해를 키운다.
프랑스에서 사망자 수가 두드러지게 잡히는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2003년 폭염 당시 실시간 보건 감시 체계가 없어 수만 명이 숨진 뒤에야 피해 규모가 드러났던 참사를 겪은 뒤 프랑스는 '플랑 카니퀼(Plan Canicule·폭염 대응 계획)'이라는 국가 폭염 조기경보 체계를 구축했다. 색깔로 구분되는 기상 경보부터 응급실 방문 일일 모니터링까지 갖춘,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폭염 보건 감시 체계로 평가된다. 그만큼 사망 통계가 빠르고 촘촘하게 집계된다.
프랑스 공중보건국에 따르면 폭염이 절정에 달한 지난 25·26일 하루 사망자는 1400명을 넘어 4~5월 하루 평균 900~1000명을 크게 웃돌았다. 이날 발표된 약 1000명의 초과 사망은 디지털 사망진단서를 토대로 한 잠정치다. 전체 사망의 약 60%만 반영하는 수치여서 최종 집계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공중보건국은 사망자의 85%가 65세 이상 고령층이었으며, 요양시설과 가정 내 사망 정보가 추가되면 사망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스테파니 리스트 프랑스 보건부 장관은 일간 라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폭염의 영향이 날씨가 누그러진 뒤에도 최장 열흘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리스트 장관은 방송 BFM에 "이번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폭염은 동쪽으로 이동하며 위세를 더하고 있다. 이날 기준 최소 1억9100만 명이 35도 이상의 극심한 더위를 겪었고, 독일·체코·헝가리·폴란드 등에서 특히 기승을 부렸다. 체코는 이틀 연속 최고기온 기록을 경신했으며 북부 도시 도크사니는 41.1도에 달했다. 폴란드는 1921년 세운 종전 기록(40.2도)을 넘어 40.5도의 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오스트리아 비정부기구(NGO) 클리마대시보드 등의 분석에 따르면 튀르키예를 제외한 유럽 대륙에서 3억8100만 명이 30도를 웃도는 폭염을 겪을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폭염은 뜨거운 공기 덩어리를 한 지역에 장기간 가두는 '오메가 블로킹' 현상이 맞물려 발생한 것으로 분석된다.
테워드로스 사무총장은 "유럽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극심한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며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학교가 문을 닫았으며 전력망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기후 변화와 지구온난화로 '한 세대에 한 번' 올 법한 폭염이 이제는 거의 매년 발생하고 있다"며 "유럽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온난화가 진행되는 대륙으로,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나 빠르게 가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WHO는 각 회원국 및 기관과 협력해 대비·예방 및 보건 시스템 강화에 나서고 있다며, 유럽 각국에 건강 피해를 줄이기 위한 '폭염 대응 행동 계획'을 적극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프랑스 공중보건국은 이날 성명에서 "폭염이 시작된 지난 24일 이후 이전 수개월간 기록된 사망자 수와 비교해 약 1000명이 초과 사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며 "특히 최고 수준의 적색 폭염 경보가 발령된 지역에서 피해가 집중됐으며, 사망자의 85%는 65세 이상 고령층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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