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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생전에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고 밝혔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일군 그가 돈도, 전략도 아닌 사람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다는 고백이다.

통계청 2024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응답자의 73.1%는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소로 '인간관계'를 꼽았다.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재산이나 지위보다 곁에 남은 사람의 질이 삶 전체를 결정한다는 사실이 수치로도 드러나는 셈이다.
그렇다면 평생 옆에 둬야 할 사람은 어떤 유형인가. 이병철 회장의 철학을 들여다보면 공통된 키워드가 하나 나온다. 능력보다 신뢰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의심이 가거든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마라"고 적었다. 한 번 믿기로 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맡겼다. 좋은 사람 한 명이 수십 년을 지탱하고, 잘못된 사람 한 명이 쌓아온 것을 하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원칙이었다.
형편이 좋을 때는 주변에 사람이 넘친다. 일이 잘 풀리고 자리가 있을 때, 연락이 끊겼던 얼굴들까지 나타난다. 하지만 사업이 꺾이거나 건강이 무너지거나 집안에 탈이 났을 때도 같은 온도로 옆에 있어주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 차이가 친구의 진짜 얼굴을 가른다.

이병철 회장은 인재를 고를 때도 비슷한 기준을 적용했다. 잘나갈 때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기에도 버티는 사람을 곁에 뒀다. 개인 관계도 다르지 않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해줄 상황에서도 떠나지 않는 사람, 딱히 득이 없어도 안부를 묻는 사람이 진짜다. 재미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힘든 시간을 함께 통과해준 사람은 평생 몇이 되지 않는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의 '제3의 장소'에서는 "인간은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공간 외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세 번째 장소를 필요로 한다"고 쓰여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공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아무 조건 없이 맞아주는 단 한 명의 존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50대 이후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사람에게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알아봤을 때 제대로 붙잡아야 한다.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언뜻 좋은 친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틀렸을 때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도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짜 곁에 둬야 할 사람은 말이 듣기 불편해도 필요한 순간에 솔직하게 꺼내는 사람이다.

이병철 회장은 "신뢰는 말이 아니라 실행에서 생긴다"고 강조했다. 달콤한 말만 늘어놓는 사람보다 행동과 말이 일치하는 사람, 때로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 사람에게 더 큰 신뢰를 줬다. 가장 좋은 관계는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진심을 숨기지 않는 관계다. 성공했을 때 자만하지 않게 붙잡아주고 실패했을 때 이유를 같이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심리학자 킴 스콧의 '완전한 솔직함'에서는 "진짜 좋은 관계는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상대에게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적혀 있다. 그 용기를 가진 사람이 오래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쓴소리를 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다들 조심하고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 한 명은 어떤 자산보다 소중해진다.
오랜 인연이라고 해서 다 좋은 관계인 것은 아니다. 만나고 돌아오면 괜히 피곤하거나, 비교당한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가라앉고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 50대 이후 관계에서는 이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젊을 때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에게 끌리기 쉽다. 하지만 나이가 쌓일수록 사람을 만나고 난 뒤 어떤 기분이 남느냐가 관계의 가치를 결정한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숨이 트이는 사람, 침묵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진짜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관계는 재미를 주는 것을 넘어 회복의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정신과 의사 에스더 페렐의 '관계의 재발견'에서는 "좋은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 앞에서는 지치지 않아도 되고 무너져도 된다는 감각이 진짜 친밀감이다"라고 적혀 있다.
에너지를 빼앗는 관계는 아무리 오래됐어도 거리를 두는 것이 맞다. 반대로 만나고 나면 더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 사람은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세월이 흐르면 형편도 달라지고 자리도 바뀐다. 누구는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고, 누구는 평범하게 살아간다. 관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걸러진다. 성공했다고 거리를 두거나, 힘들어졌다고 슬그머니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과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이 대해주는 사람이 있다.

이병철 회장은 사람의 됨됨이를 볼 때 '변하지 않는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잘될 때 배울 것이 있을 때만 가까이하고, 쓸모가 없어 보일 때 멀어지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곁에 오래 둘 수 없는 인물이라고 봤다. 상황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은 내가 어디에 있든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는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진짜 안정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같은 눈으로 봐주는 단 한 사람에게서 온다"고 말했다. 형편이 좋을 때도, 나빠졌을 때도 변하지 않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 평생 곁에 둬야 할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 한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관계를 줄여나가면서 진짜 몇 명을 깊이 품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후자가 대부분 더 편안한 노년을 보낸다.
이병철 회장이 평생 강조한 것도 결국 그 한 명이었다. 신뢰할 수 있고 솔직하고 상황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 한 명이 곁에 있는 것이 어떤 재산보다 오래 가는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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