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서 쉴 사람은 쉬어라”…이건희 회장이 남긴 뜻밖의 인생철학 '1가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떠올리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들에게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일침을 가하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불량 휴대폰을 임직원들 앞에서 불태우며 질(質) 경영을 외치던 워커홀릭이자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다. 그런데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는 이런 통상적인 이미지와는 결이 다른 문장이 하나 있다. "회사서 쉴 사람은 쉬어라"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자비로운 휴머니즘 발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삼성을 내수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바꾼 결정적 통찰이 담긴 말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뉴스1

1993년 프랑크푸르트, 위기에 빠진 1등 기업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삼성은 국내에서는 1위 기업이었지만 해외에서는 싸구려 2류 브랜드로 취급받았다. 이 회장은 미국 대형 전자상가 매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는 삼성 TV를 직접 목격했다. 세탁기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직원이 칼로 플라스틱 문짝을 깎아 억지로 조립하는 영상을 본 뒤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회장은 사장단과 임원 수백 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양(量) 위주의 성장을 버리고 질(質) 위주 경영으로 전환하라는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문제는 선언 이후였다. 수십 년간 국내 1등이라는 온실 속에서 안주해온 조직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적당히 해도 월급은 나오는데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무사안일주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인재들에게 튀지 말라고 압박하는 구태가 조직 내부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개혁의 드라이브가 내부 저항에 막혀 있던 그 순간, 이 회장은 조직의 체질을 바꿀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쉴 사람은 쉬어라, 다만 뒷다리는 잡지 마라"

이 회장이 남긴 발언의 전문을 보면 그 진짜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회사서 쉴 사람은 쉬어라. 변화하기 싫은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좋다. 안 뛸 사람은 안 뛰어도 된다. 억지로 끌고 갈 생각 없다. 하지만 열심히 앞으로 뛰어가려는 사람의 뒷다리를 잡지 마라. 앞장서서 개혁해보겠다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뒤에서 발목 잡고 늘어지는 행위,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1988년 7월23일 정계최고 경영자 전지 세미나 연설 모습./ 삼성전자 제공-뉴스1

이 문장에는 두 가지 경영 논리가 담겨 있다. 첫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인정이다. 만 명이 넘는 조직 구성원을 한날한시에 같은 속도로 뛰게 만드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대하는 사람을 일일이 설득하려 들면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고갈돼 혁신의 타이밍을 놓친다. 그래서 이 회장은 바뀌지 않을 사람은 가만히 두는 현실적인 노선을 택했다. 둘째는 네거티브 시너지의 차단이다. 진짜 문제는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달려가는 동료의 뒷다리를 잡는 사람이었다. 이 회장은 이런 발목 잡기를 조직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가장 치명적인 요인으로 진단했다. 삼성이 택한 전략은 단순했다. 준비된 사람을 먼저 뛰게 하고, 그 성과를 보여줘 나머지 구성원이 위기감을 느껴 스스로 따라오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일상 속 '뒷다리형 인간' 3가지 유형

이 메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 직장과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 할 때 주변에는 의외로 발목을 잡는 사람이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근거 없는 냉소형 : 새로운 도전을 말했을 때 대안이나 조언 없이 과거 단점만 들추며 "네가 무슨"이라는 식으로 의지를 꺾는 부류다.

2. 동반 하향형 : 자신이 정체된 데서 오는 불안감을 감추려 주변 사람도 같이 머무르게 만드는 유형이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려 하면 시간을 빼앗아 술자리로 끌어당긴다.

3. 경험 오류형 : 자신의 실패 경험이나 들은 이야기를 일반화해 "그거 해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단정하는 부류다.

세 유형 모두 공통점이 있다. 실질적인 대안을 주지 않고 의지만 꺾는다는 점이다.

회사 사무실 풍경.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건강한 조언'과 '발목 잡기',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기준

주변의 모든 쓴소리가 발목 잡기는 아니다. 진짜 나를 아끼는 사람의 우려는 인생의 자산이다. 구분 기준은 명확하다. 건강한 조언은 리스크를 줄이고 대비책을 같이 고민하는 화법을 쓴다. 반면 발목 잡기는 "그거 해서 뭐 하냐, 그냥 대충 살아라"는 식으로 대안 없이 현재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 듣고 나서 머리가 맑아지면 조언이고, 힘이 빠지고 불쾌한 감정만 남으면 발목 잡기에 가깝다.

실천 방법…내 삶에 적용하는 팁은?

이 회장의 발언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 모든 사람을 설득하려는 강박을 버리는 것이다. 부모, 배우자, 오랜 친구가 내 변화를 전부 지지해주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살아온 궤적과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밤새 설득하는 일은 에너지 낭비에 가깝다. 다음으로는 정서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회사라면 인사고과로 발목 잡는 직원을 정리할 수 있지만 개인의 관계에서는 물리적 손절이 쉽지 않다. 대신 이직 준비나 투자 공부 같은 중요한 계획을 발설하지 않고 가벼운 주제로만 대화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응이 된다.

30여년 전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던진 "회사서 쉴 사람은 쉬어라"는 한마디는 결국 내 속도를 타인에게 맞추지 말고 타인의 냉소에 발걸음을 양보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읍힌다. 무언가에 몰두해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 쓰는 시간, 발목 잡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데 쓰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큰 손실이라는 점이 이 발언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다.

홀로 사무실에 남아 일하는 사람.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심리학에서 말하는 '게 양동이 효과'

사실 발목잡기 현상은 심리학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된 주제다. '크랩 멘탈리티'로 불리는 이론에 따르면 양동이 안에 게를 여러 마리 넣어두면 한 마리가 밖으로 기어 나가려 할 때 다른 게들이 다리를 붙잡아 끌어내린다. 게 한 마리만 있다면 충분히 양동이를 빠져나갈 힘이 있는데도 무리 속에 있으면 결국 다 같이 양동이 안에 머무는 결과로 끝난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집단 내에서 한 명의 성공이 나머지 구성원의 상대적 위치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타나는 방어적 행동으로 설명한다. 이건희 회장이 경계했던 뒷다리 잡기 역시 이 게 양동이 효과와 본질적으로 같은 메커니즘이다. 조직 안에서 누군가 먼저 변화를 시도하면 나머지 구성원의 정체된 위치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일부가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다.

사회적 태만과 무임승차자 문제

조직행동학에서는 이런 현상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개념으로 사회적 태만을 꼽는다. 집단 안에서 개인의 기여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 구성원 일부가 노력을 줄이고 다른 사람의 성과에 무임승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이론이다. 이건희 회장이 쉴 사람은 쉬라고 한 것은 이런 무임승차자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끌고 가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조직의 에너지를 갈아먹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여러 빅테크 기업들이 성과 기반 평가 체계를 강화하고 저성과자를 별도로 관리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변화에 동참할 의사가 없는 인력을 무리하게 독려하기보다 변화를 이끌 핵심 인력에게 자원과 권한을 집중하는 쪽이 조직 전체의 효율을 높인다는 판단이다.

"그 말은 칭찬이 아니다"…발목잡기 알아채는 대화 '신호'

사람들 인파. 기사 내용 토대로 AI툴 활용해 제작한 자료사진.

실제 대화 상황에서 발목잡기를 즉각 구분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내 계획을 듣고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가 아니라 "그게 되겠어"라면 이미 그 대화는 방어적 태도로 시작된 것이다. 건강한 조언자는 구체적인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질문을 던지지만, 발목 잡는 사람은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질문을 던진다. 또 하나의 신호는 타이밍이다. 내가 어떤 성과를 냈을 때 축하보다 먼저 "운이 좋았네"라거나 "그게 오래가겠어"라는 반응이 나온다면 이 역시 전형적인 발목잡기 화법이다. 이런 신호를 미리 인지하고 있으면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거리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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