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쯔양, 구제역 손배소 2심서 배상액 올라…일부 승소

더팩트

[더팩트ㅣ울릉=김성권 기자] 대한민국 영토주권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독도 암벽의 '한국령(韓國領)' 세 글자를 직접 쓰고 새긴 주인공이 반세기가 훨씬 지나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오랫동안 제작 경위가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독도 대표 표식의 제작 과정 실체가 드러나면서 영토 수호의 역사와 함께 이를 만든 이들의 공로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1일 <더팩트> 취재를 종합하면, 독도 동도 암벽에 새겨진 '한국령' 휘호는 1954년 당시 울릉도를 대표하던 명필 고(故) 한진호 서예가가 썼으며, 암벽에 글자를 직접 새긴 서각 작업은 조명호(76) 씨가 맡아 완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한국령' 표식은 독도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이를 제작한 인물과 과정은 명확히 기록되지 않아 역사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조명호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967년 독도경비대 통신장으로 근무하던 부친 조영진 순경을 따라 17세 나이에 독도로 들어갔다.

당시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경찰들의 권유로 서각 작업을 맡게 된 조 씨는 앞서 한진호 서예가가 써 놓은 글씨 체본을 바탕으로 경비대원들이 미리 다듬어 놓은 등대 아래 암벽에 망치와 정을 이용해 이틀 동안 '한국령' 세 글자를 새겼다.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망치와 정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줄을 이용해 다시 끌어올리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고, 거센 바람과 파도 속에서 암벽을 다듬으며 작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조 씨는 "당시 경비대 간부였던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중요한 작업을 맡겼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해 오랫동안 이 사실을 밖에 알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조씨는 <더팩트>와의 전화통화에서 "지금의 17세를 생각하면 그런 위험한 작업을 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며 "열악한 독도 환경에서 망치와 정으로 글자를 새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울릉도의 시대상도 함께 떠올렸다.
조 씨는 "당시에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그만두고 독도경비대 식당 보조 등으로 들어와 월급 대신 귀했던 자연산 미역을 채취해 생계를 이어가는 또래 친구와 형들이 적지 않았다"며 "독도는 생계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지키는 최전선이었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지난해 6월 보훈단체 역사탐방 행사로 다시 독도를 찾은 조 씨는 반세기 전 기억을 더듬으며 정상 일대를 둘러봤다.
그는 당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막사 뒤편 바위에 철못으로 몰래 새겨 놓았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아 사진으로 남기며 깊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번 제작자 확인은 독도의 '한국령' 표식이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민간인과 독도경비대가 함께 대한민국 영토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역사적 결과물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덕준 서예가는 "작품의 제작자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늘 아쉬웠다"며 "이 작품은 건물 벽면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 절벽을 캔버스로 삼은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박 서예가는 "'한국령' 세 글자는 먼바다에서 바라볼 때 마치 눈앞에 직접 쓴 듯한 착시 효과를 줄 정도로 공간 구성이 뛰어나다"며 "강인한 필획과 웅장한 기세, 그리고 한 획 한 획에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이 담긴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말했다. 이어 "역사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독도 암벽의 '한국령' 세 글자는 지금도 대한민국 영토주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식으로 남아 있다.
이번 제작자 규명을 계기로 휘호를 남긴 명필 한진호 서예가와 암벽에 혼을 새긴 조명호 씨, 그리고 당시 독도경비대원들의 공로를 국가 차원에서 기록하고 현창해야 한다는 요구도 더욱 힘을 얻고 있다.
tk@tf.co.kr

관심 없음
{카테고리}에 관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