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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ㅣ울릉=김성권 기자] "식량이 모두 떨어져 미역과 거북손을 끓여 먹으며 버텼습니다. 목숨을 걸고 서도에서 구해온 차조 두 자루가 대원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1967년 여름, 거센 풍랑 속에서 보급이 끊긴 독도를 지키기 위해 굶주림과 사투를 벌였던 독도경비대의 처절한 생존기가 반세기 만에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독도 동도 암벽에 '한국령(韓國領)' 서각 작업을 하며 경비대원들과 함께 생활했던 17세 소년 조명호(76) 씨는 "독도를 지킨다는 사명감 하나로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버텼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26일 조 씨 증언에 따르면 1967년 8월 경비대 교대를 앞두고 독도 해역의 기상이 급격히 악화됐다. 교대 예정일을 넘겨서도 높은 파도와 강풍이 이어지면서 울릉도에서 출항한 보급선은 독도에 접근하지 못했고, 막사에 비축했던 식량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남은 쌀을 아끼기 위해 나흘 동안 묽은 죽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것마저 모두 떨어지자 대원들은 잠시 파도가 잦아든 틈을 이용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바위에 붙은 미역과 거북손(따개비)을 뜯어 국을 끓여 허기를 달래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조 씨는 "배고픔보다 언제 보급선이 올지 모른다는 막막함이 더 두려웠다"며 "독도의 거친 파도와 바람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기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당시 경비대장이었던 조 씨의 부친 조영진 씨는 긴급회의를 열어 서도 물골에 거주하던 독도 최초 주민 고(故) 최종덕 씨에게 식량을 구해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원들은 독도 경비에 사용하던 작은 전마선을 급히 개조했다.
배 중앙에 가로대를 설치해 두 명이 동시에 노를 젓고, 한 명은 키를 잡고, 또 다른 한 명은 쉴 새 없이 배 안으로 들이치는 바닷물을 퍼내는 방식이었다.
4명의 대원은 집채만 한 파도를 뚫고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섰다.
동도 막사에 남아 있던 대원들과 조 씨는 지금의 헬기장 인근에서 서쪽 탕건봉 방향을 바라보며 배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거센 파도에 전마선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참 뒤 서도 물골 쪽으로 사라졌던 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돌아온 대원들은 온몸이 바닷물에 젖은 채 아무 말 없이 눈시울만 붉히고 있었다.
그들이 어렵게 구해온 식량은 당시 해녀들의 주식이었던 차조 두 자루였다.
조 씨는 "아버지는 '대장으로서 대원들을 굶기게 된 책임이 너무 무겁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며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말했다.

대원들은 차조를 끼니 삼아 다시 사흘을 버텼고, 이후 기상이 회복되면서 울릉도 도동항을 출항한 화랑호가 독도에 입도해 무사히 교대가 이뤄졌다.
굶주림과 풍랑을 견뎌낸 경비대원들은 끝까지 독도를 지킨 뒤 임무를 마치고 울릉도로 철수했다.
조명호 씨는 "어린 나이에 겪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지만 독도를 지킨다는 마음 하나로 모두가 가족처럼 버텼다"며 "그때의 경험은 이후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게 만든 평생의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번 증언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굶주림과 거친 동해를 견디며 국토의 최동단을 지켜낸 독도경비대의 희생과 사명감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풍랑으로 보급이 끊기고 미역과 거북손으로 연명해야 했던 극한의 상황, 그리고 생명을 건 항해 끝에 구해온 차조 두 자루는 당시 독도 수호의 치열했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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