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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

[더팩트ㅣ강일홍 기자] K팝의 세계적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 가수들의 노래와 춤은 이제 국경을 넘어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중심부를 파고들고 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해외 팬들의 함성은 K팝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 됐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와 뜨거운 환호 뒤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만큼 그에 걸맞은 책임과 신뢰도 갖추고 있느냐는 점이다.
최근 걸그룹 르세라핌의 필리핀 마닐라 공연 일정 변경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당초 12월 5일과 6일 예정됐던 공연이 5일 하루 공연으로 축소되면서, 예매자들에게는 기존 좌석 재배정이나 환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공연 일정이 변경될 수는 있다. 공연이라는 것이 아티스트의 일정은 물론 현지 여건과 여러 계약 관계가 맞물려 진행되는 복합적인 사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관객 입장에서만 보면, 티켓을 예매하고,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하고, 공연 당일을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일정 변경은 단순히 하루의 차이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이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여행 계획의 차질이며, 무엇보다 쉽게 되돌릴 수 없는 기대의 상실이다. 특히 해외 팬들은 공연 하나를 보기 위해 국경을 넘고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K팝 존재감' 문화 아이콘이자 글로벌 팬덤 움직이는 브랜드 파워
주최 측이 환불과 좌석 재배정이라는 절차를 마련했다고 해서 모든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환불은 소비자가 지불한 티켓값을 돌려주는 행정적 조치일 뿐, 팬들이 이미 부담한 항공료와 숙박비, 이동 비용까지 보상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정 변경에 따른 모든 손실을 주최 측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만큼 신중하게 일정을 결정하고, 불가피하다면 팬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욱 아쉬운 것은 K팝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누리는 영향력에 비해 해외 팬들을 대하는 책임 의식은 과연 그 수준에 도달해 있는가 하는 점이다. K팝의 세계화는 단순히 음원 차트 순위를 높이고 해외 공연 횟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현지 팬들이 한국 아티스트에게 보내는 애정과 신뢰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그 신뢰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K팝 아티스트는 한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이자 글로벌 팬덤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브랜드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 하나, 공식 석상에서 내놓는 말 한마디에도 그만한 무게가 실린다. 그렇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공연과 이를 둘러싼 산업적 결정에도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 스타의 이름을 내걸고 세계 시장에서 활동하는 이상, 팬들과 맺은 신뢰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화려한 공연보다 '팬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의 질문이 먼저
물론 이번 르세라핌 공연 일정 변경을 아티스트 개인이나 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공연 운영과 계약, 현지 사정에 관한 구체적인 경위는 주최 측인 펄프 라이브 월드가 회차 취소 안내 및 설명을 통해 확인해준 바 있다. 그렇다고 아티스트와 소속사, 공연 주최 측이 책임의 경계를 나누는 데만 급급해서도 안 된다. 팬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잘못했느냐는 책임 공방보다 자신들이 존중받고 있는지 여부다.
K팝은 지금 세계를 향해 더 넓은 무대를 열고 있다. 그만큼 팬들의 기대도 커지고, 산업이 감당해야 할 책임도 무거워지고 있다. 공연을 팔 때는 글로벌 스타의 이름과 인기를 앞세우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계약과 환불 규정 뒤로 숨는다면 팬들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한 만큼 글로벌 수준의 운영과 소통, 소비자 보호 의식도 갖춰야 한다. 팬들은 단순히 티켓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세계를 열광시키는 것은 스타의 몫이다. 그러나 그 무대를 기다리는 팬들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스타와 기획사, 공연 산업 모두의 몫이다. K팝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말은 이제 그만큼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계가 K팝을 주목하는 지금, 정작 K팝은 세계의 팬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화려한 공연보다 먼저 돌아봐야 할 질문이다. 그들의 열정과 지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 K팝이 쌓아온 신뢰의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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