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도둑 관전’서 ‘우산 쇼’까지...K리그 40년의 '기적'[이영규의 비욘더매치]

29년 전 취재 풍경이 건네는 문답… K리그 40년은 어떻게 성숙해 왔는가
기록지 위 ‘허수’를 지우고 팬들의 ‘서사'를 채우다


지난달 19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OGFC(더 오리지널 FC) 대 K리그2 수원삼성 레전드의 경기에서 수원삼성 서포터즈가 우산 응원을 펼치고 있다. /수원=뉴시스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최근 K리그의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종합 예술이다.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검파(검정·파랑)’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일제히 머플러를 하늘 높이 펼쳐 들고 장엄한 벽을 이룬 채, 경기장이 떠나갈 듯 웅장한 '떼창'으로 스탠드를 흔든다. 대구의 축구전용구장에서는 경기 막판 하늘색으로 물든 전 관중이 발을 구르며 알루미늄 스탠드 전체를 울리는 세찬 ‘쿵쿵골’ 소리가 땅을 뒤흔든다. 전주성을 가득 메운 초록색 물결의 ‘오오렐레’ 춤은 또 어떠한가.

여기에 K리그2 수원 삼성 서포터즈, '프렌테 트리콜로(Frente Tricolor)'가 펼치는 눈부신 청백적 우산 돌리기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격세지감을 넘어 경외감마저 든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창의력은, 이제 축구가 단순한 경기를 넘어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강한 놀이 문화로 성장했음을 실감케 한다.

◆ 29년 전의 기억, 프로축구 결핍의 시대

하지만 이 찬란한 풍경 너머로, 29년 전 프로축구 취재 현장에서 마주했던 어느 지방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 묘하게 겹쳐진다. 야간 조명탑조차 갖추지 못해 낮 경기를 치러야 했던 시절, 본부석에서 바라본 맞은편 광활한 스탠드에는 손에 꼽을 정도의 관중만이 점을 찍듯 듬성듬성 앉아 있어 휑한 콘크리트 바닥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진풍경은 오히려 경기장 밖에서 펼쳐졌다. 인근 고층 건물 옥상마다 상당수의 시민이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차역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내다본 풍경도 기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 곳곳에는 특정 기념일을 맞아 경기를 ‘무료 개방’한다는 현수막이 힘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 정식으로 관람하기보다 이웃집 옥상에서 즐기는 ‘도둑 관전’이 더 익숙했던 시대. 당시 프로 출범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과연 한국 땅에 프로축구가 뿌리내릴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구단이 관중 수를 임의로 기입해도 검증할 방법조차 없던 시절, 불과 100여 명에 불과했던 관중 수는 기록지 위에서 구단 관계자의 펜 끝을 거쳐 정교한 네 자릿수 숫자로 둔갑해 ‘공식 역사’로 저장되곤 했다.

당시 8개 구단 체제였으나 모두 기업의 시혜적 후원에 전적으로 의존했기에 관중 수에 민감하지 않았고, 구단과 팬 모두에게 ‘프로화’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결핍의 시대였다.

지난해 10월8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2 인천-수원삼성전. 파랑검정 유니폼을 입은 인천 서포터즈가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 인천=K리그

◆ 문화의 씨앗, 관객에서 ‘서포터’로

축구 경기가 90분간 공을 차는 게임이라면, 리그는 수십 년간 쌓인 감정과 기억의 기록이다. 어느덧 출범 40년을 훌쩍 넘어선 K리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대견한 이유는, 성적표라는 수치보다 그 속에 흐르는 작지만 단단한 '우리만의 서사'가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K리그 40여 년이 남긴 값진 유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각 구단만의 색깔을 담은 독창적인 응원 문화다. 수원 삼성의 ‘청백적 우산 돌리기’는 이제 외신이 주목하는 시그니처 퍼포먼스가 되었고, 안양의 전설적인 ‘붉은 홍염’이나 앞서 언급한 인천의 뜨거운 함성, 대구의 웅장한 ‘쿵쿵골’, 전북의 신명 나는 ‘오오렐레’는 구단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다. 특히 '삼색 전선'을 뜻하는 프렌테 트리콜로는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된 시련 속에서도 오히려 더 끈끈하게 결집하며 구단의 생명력을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팬덤의 성숙은 고무적이다. 팬들은 이제 단순한 관람객을 넘어 구단의 아픔과 환희를 공유하며 스스로 서사를 생산하는 주체가 되었다. 연고 이전의 한을 딛고 재회한 안양과 서울, 시민의 힘으로 일궈낸 부천의 재기 등은 K리그를 한 편의 대하드라마로 만드는 핵심 동력이다.

지난 4월4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현대가더비' 전북현대-울산HD전에서 전북 모따(왼쪽)와 울산 정승현(가운데)이 공중볼 경합을 벌이고 있다./전주=K리그

◆ ‘라이벌리’,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힘

비록 유럽 명문 리그의 거대한 규모와 역사를 따라가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40여 년 세월 속에서 K리그 구단들이 맺어온 관계의 깊이는 그 나름의 정통성을 확보해가고 있다. 이제 팬들은 단순히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역사가 얽힌 대결'에 반응한다.

울산과 포항의 ‘동해안 더비’는 1983년부터 이어온 최고의 라이벌전이다. '호화 군단' 울산과 '시스템'의 포항이 맞붙는 이 대결은 40여 년의 시간이 쌓여 자존심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 10여 년간 패권을 두고 격돌한 울산과 전북 간의 ‘현대가(家) 더비’는 막강한 자본력과 스타들이 충돌하며 K리그의 기술적 수준을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다.

리그가 나뉘며 잠시 멈춰 선 서울과 수원 삼성의 ‘슈퍼매치’는 여전히 K리그 서사의 큰 줄기를 담당해왔다. 이러한 라이벌 구도는 단순히 승점 3점을 위한 다툼이 아니다. 지역의 자부심과 구단의 철학이 투영된 ‘문화적 격돌’이다.

◆ 구단의 몫: 우리만의 서사를 정성껏 가꿔나갈 때

지난해 12월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광주FC와 전북현대의 2025 하나은행 코리아컵 결승전에서 전북현대 팬들이 응원을 펼치고 있다. / 뉴시스

K리그가 더 풍성한 서사를 갖기 위해서는 성적 이상의 ‘철학’을 공유하는 구단들이 늘어나야 한다. 우리가 유럽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표방하는 명확한 색깔 때문이다. 단순한 승리를 넘어 '어떤 축구로 팬들을 감동시킬 것인가'라는 구단만의 철학적 정체성이 확고할 때, 리그의 서사는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2026년 현재, K리그의 전술적 토양도 조금씩 비옥해지고 있다. 과거 한국 축구를 지배했던 무기가 '투혼'과 '정신력'이었다면, 이제는 명장들의 세밀한 지략 대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팬들은 이제 단순히 성적에만 일희일비하지 않고, 감독의 전술 철학이 충돌하는 지점을 분석하며 경기를 ‘읽기’ 시작했다. 팬들의 수준 높은 시선은 리그를 전진하게 하는 든든한 조력자다.

29년 전, 옥상에서 경기를 내려다보던 척박한 풍경에 비하면 지금의 K리그는 분명 대견한 성취를 이뤄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일은 아니다. 이제 겨우 우리만의 응원 문화와 전술적 고민, 라이벌 서사가 싹을 틔웠을 뿐이다.

세계적인 명문 구단들이 전설이 된 것은 수세대에 걸친 팬들의 삶과 철학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K리그의 40년 축적은 완성이 아닌, 이제 막 제대로 된 '이야기책'의 첫 장을 넘긴 것에 불과하다. 옥상 위의 도둑 관전이 전용구장의 뜨거운 함성으로 변했듯, 우리만의 서사를 구단과 팬이 함께 묵묵히 쌓아가다 보면 비로소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계가 부러워할 우리만의 명가(名家)들도 곧 탄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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