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규의 자진 ‘레드카드’, 이제 비난 접고 축제를 열 때 [박순규의 창]

한국축구 수장의 자진 ‘레드카드’, 이제 비난을 넘어 축제로
‘약속의 땅’을 향해, 오직 축구만을 응원할 시간


2026 북중미 월드컵에 출전하는 한국대표팀 선수들이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사전 캠프에서 훈련하고 있다./솔트레이크시티=KFA

[더팩트 | 박순규 기자] 2026 북중미 월드컵 개막을 불과 2주 앞두고 한국 축구계에 예상치 못한 뉴스가 날아들었다. 13년 동안 대한축구협회를 이끌어온 정몽규 회장이 29일 월드컵 직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한국 축구 역사에서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축구협회장이 스스로 퇴진을 선언한 사례는 전무했다. 그만큼 초유의 사태이자 상징적인 결정이다.

돌이켜보면 정몽규 회장의 13년 재임 기간은 명암이 뚜렷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지난 201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 축구의 외형적 성장과 인프라 확대를 이끌었다. 천안 코리아풋볼파크 건립을 통한 선진 인프라 구축, 한국 축구의 뿌리를 단단히 한 디비전 시스템 도입, 그리고 세계 축구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은 그의 분명한 공(功)이다. 그러나 승부조작 축구인 사면 파동과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불거진 절차적 논란, 문화체육관광부와의 갈등 등은 축구 팬들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고, 이는 결국 거센 퇴진 압박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축구는 결국 팬들의 사랑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좋은 시설과 시스템을 갖춰도 팬들의 신뢰를 잃으면 조직은 존재 이유를 잃는다. 최근 대표팀 경기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적인 시선 역시 이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정 회장은 사퇴 성명에서 "모든 것은 제 부덕의 소치"라고 말했다. 정치적 판단이든 책임 의식의 발로이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 자신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팀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사실만큼은 의미 있게 평가할 수 있다. 공자(孔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했다.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이 진짜 잘못이라는 뜻이다.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어느 시점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 또한 리더십의 한 형태일 수 있다.

그동안 협회의 행정 난맥상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팬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제 리더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책임을 통감한 만큼 해묵은 갈등과 비난의 칼날은 잠시 거둘 때가 됐다. 정 회장은 사퇴 선언과 동시에 "대표팀이 본선에서 성과를 내도록 지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임"이라며 팬들을 향해 전폭적인 응원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가 스스로에게 내민 '레드카드'는 역설적으로 온 국민이 하나 되어 대표팀을 응원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용기 있는 결단으로 보인다.

대표팀 선수들에게 정몽규 회장의 거취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조별리그에서 맞닥뜨릴 체코와 멕시코, 남아공과의 치열한 90분 승부다. 손흥민에게는 네 번째 월드컵이자 마지막 월드컵이 될 가능성이 높고, 김민재와 이강인, 황인범, 조현우에게도 지금이 가장 성숙한 전성기다. 이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치고 피치를 누빌 수 있는 팬들의 하나된 응원이 더 절실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는 40년 동안 월드컵을 통해 국민들에게 수많은 감동을 선물했다. 2002년 4강 신화, 2010년 원정 16강, 2018년 독일전 승리, 2022년 카타르의 극적인 16강 진출까지 월드컵은 늘 한국 사회를 하나로 묶는 특별한 무대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찬반의 갈등이 아니다. 협회 개혁 논의는 월드컵 이후 차분하게 진행하면 된다. 새로운 지도부 선출도, 제도 개선도 그때 논의해도 늦지 않다. 적어도 앞으로 한 달여 동안만큼은 모든 관심과 응원이 선수들에게 향했으면 한다. 축구 행정에 대한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북중미 대륙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선수들의 땀과 도전에 박수를 보내야 할 시간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축제를 앞두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축구회관의 행정실이 아니라,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며 고지대 적응 훈련에 한창인 홍명보호의 그라운드다. 감독 선임 과정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도, 협회를 향한 차가운 시선도 잠시 내려놓자. 온갖 정치적·행정적 노이즈에서 벗어나 오직 축구 그 자체만을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고 응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한국 축구를 위하는 길이다.

43년 전, 선인장의 나라 멕시코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계 4강의 기적을 일궈냈던 청춘들의 열정이 다시금 북중미 대륙에 울려 퍼져야 할 시간이다. 사상 첫 원정 8강이라는 위대한 도전을 앞둔 태극전사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싸늘한 시선이 아닌, 터질 듯한 함성과 아낌없는 신뢰다. 수장의 용퇴 선언으로 행정적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된 만큼, 이제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대륙을 뒤흔들 감동의 서사를 함께 써 내려가길 기대한다. 축제는 이미 시작됐고, 우리는 그저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던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소리 높여 외치면 된다. 대한민국 축구, 다시 한번 전진이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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