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축구는 '독'...홍명보호, 남아공선 '박지성'을 복제하라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구보 부상' 지운 일본의 빠른 템포-과감한 침투-오프더볼 참고해야
이겨야 하는 순간에 '수비축구'는 독, 망설임 없이 나서야


일본축구대표팀 카마다 다이치(15)가 21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F조 튀니지전 전반 4분 첫골을 넣은 뒤 팔을 벌려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몬테레이(멕시코)=AP 뉴시스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지금 일본 축구의 기세는 부러움을 넘어 솔직히 무섭기까지 하다. 지난 21일(한국시간) 펼쳐진 2026 북중미 월드컵 F조 조별리그 튀니지전은 일본이 이번 무대를 얼마나 집요하고 영리하게 준비해왔는지 똑똑히 보여준 한 판이었다. 1차전에서 유럽의 강호 네덜란드와 2-2로 비기며 예사롭지 않은 출발을 알리더니, 조별리그의 운명이 걸린 이날 튀니지전에서는 무려 4-0이라는 시원한 완승을 거두며 조 1위 통과 가능성을 이어갔다.

가장 부러운 대목은 따로 있었다. 지난 1차전에서 부상으로 쓰러진 에이스 구보 다케후사의 빈자리가 단 1초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핵심 선수가 빠진다는 건 어떤 팀에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대형 악재다. 그럼에도 일본이 그라운드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영웅 한 명의 발끝이 아니었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패스 템포, 망설임 없이 빈 공간을 파고드는 과감함, 그리고 현대 축구의 영원한 스승 요한 크루이프가 그토록 강조했던 ‘살아 숨 쉬는 오프더볼(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이 만든 완벽한 구조의 승리였다.

이날 일본이 보여준 경기력은 승리가 간절한 경기에서 팀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 보여준 최고의 교과서였다. 처음부터 라인을 내리지 않고 과감하게 전진해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고, 덕분에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까지 챙겼다. 오는 25일 남아공과 운명의 3차전을 앞둔 우리 홍명보호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뜨거운 자극제다.

◆ 구보의 공백을 지운 공간 창출, 그리고 크루이프가 남긴 속삭임

요한 크루이프는 생전에 축구의 본질을 꿰뚫는 위대한 문장을 남겼다.

"항상 생각하고 항상 움직여야 한다.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은 동료를 외롭게 만들 뿐이다. 패스는 내 발을 떠나는 순간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움직임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가지지 않은 순간의 움직임이다. 당신이 공을 잡고 있지 않은 87~89분 동안 무엇을 하느냐가 당신이 진짜 좋은 선수인지를 결정한다."

튀니지를 무너뜨린 일본의 힘이 바로 이 크루이프식 철학의 눈부신 재현이었다. 일본 선수들은 가만히 서서 공이 오기를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끊임없이 잔발을 밟으며 다음 동작을 이어갈 수 있는 유리한 몸 방향을 미리 만들어두었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웠던 건 패스를 받는 ‘미끼 선수’에게 상대 수비의 시선이 완전히 쏠린 그 찰나, 제3의 선수가 배후 공간으로 날카롭게 잘라 들어가며 공을 이어받는 ‘공간 파괴’의 움직임이었다. 이 장면은 축구팬에게 짜릿함마저 선사했다. 공을 주고 나면 그 자리에 얼어붙곤 하던 우리 한국 축구의 정적인 모습과 너무나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부러운 장면이었다.

일본축구대표팀 우에다 아야세(18)가 21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튀니지전에서 상대 수비수 사이를 뚫고 볼을 몰고가고 있다./ 몬테레이(멕시코)= AP 뉴시스

◆ 승리에 쐐기를 박은 치명적인 창끝, 망설임 없는 '직진 패스'

일본은 경기 초반부터 나카무라 게이토와 도안 리츠 등 양 윙백을 과감하게 전진시켜 상대 수비진을 깊숙이 몰아넣었고, 문전 앞 좁은 공간에서 정교하고 빠른 패스를 주고받으며 골마우스 근처에 다수의 공격수가 동시에 침투, 4분만에 득점의 물꼬를 트고 손쉽게 승기를 잡았다.

일본은 단순히 공을 예쁘게 돌리는 정형화된 점유율에 고착되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패스로 일찌감치 주도권을 쥔 일본은, 후반 들어 한층 더 날카로워진 창끝을 매섭게 휘둘렀다. 그 정점이 바로 후반 24분에 터진 이토 준야의 3-0 추가골 장면이었다.

상대 수비 벽에 아주 작은 틈이 벌어지자, 최종 수비진의 직진 패스를 중원의 우에다가 망설임 없이 전방으로 볼을 논스톱 연결했다. 상대가 일본의 짧은 패스를 막으려 라인을 어설프게 올린 타이밍을 역으로 완벽하게 받아친 것이다. 패스가 투입되는 타이밍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폭발적으로 오프더볼 침투를 감행한 이토 준야의 단독 찬스에 이은 득점은 일본이 왜 무서운 팀인지를 증명했다.

철저히 계산된 패스의 속도와 침투 타이밍이 결합된, 그야말로 EPL 브라이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로베르토 데 제르비식 ‘압박 유인 후 인위적인 연습 전환’의 교과서 같은 골이었다. 일본은 이 전술적 동력을 이어가 결국 4-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경기를 마쳤다.

◆ 주도하는 축구가 선물한 달콤한 열매, '로테이션의 선순환'

이처럼 완벽한 공격 지향 축구는 경기 후반부 일본에 거대한 전술적 특권을 부여했다. 3-0으로 확실하게 경기를 리드하자, 일본은 후반 30분 이후 과감한 선수 교체를 통해 주전들의 체력을 안배하고 백업 선수들에게 무대 경험을 선물하는 '로테이션의 선순환'을 가져갔다.

구보의 부상이라는 악재 속에서 경기를 어렵게 끌고 가 주전들이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면 다음 경기까지 누적되는 피로도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 시간 터진 추가골 덕분에 핵심 자원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줄 수 있었다. 이처럼 심리적으로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라운드를 밟은 백업 선수들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뿜어낼 수 있었고, 이는 대회 후반부로 갈수록 팀을 지탱할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남아공 축구대표팀 모코에나가 지난 19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A조 조별리그 두번째 경기 체코전에서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고 있다. 남아공은 체코와 1-1로 비겨 승점 1점을 확보했다./ 애틀랜타(미 조지아주)=AP 뉴시스

◆ 홍명보호가 새겨야 할 남아공전 해법

우리가 마주할 남아공은 탄력 넘치고 단단한 수비 벽을 세우는 까다로운 팀이다. 한국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 3차전의 유일한 열쇠는, 부럽게도 일본이 실시간으로 증명해 보인 바로 이 경기 방식뿐이다.

우리 한국 축구는 늘 수비적 안정감을 우선시하다가 먼저 얻어맞거나, 경기 막판까지 1-0의 아슬아슬한 리드를 지키느라 주전 선수들의 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곤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이기더라도 다음 경기에 미치는 체력적 타격은 고스란히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한다.

잡아야 할 경기에선 초반부터 매섭게 전진 패스를 찌르고,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상대 문전을 타격해 먼저 승기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여유로운 경기 조율과 로테이션으로 채우며 다음을 도모하는 영리함, 그것이 지금 홍명보호가 도달해야 할 진짜 전술적 지향점이다.

지난 19일 멕시코전처럼 의미 없는 좌우 횡패스로 시간을 끌면, 남아공의 밀집 수비는 우리를 비웃듯 너무나 쉽게 길목을 차단할 것이다. 중원 좁은 공간에서도 빠른 템포를 앞세운 정교한 숏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 수비수를 유인해 과감히 공격루트를 뚫고, 손흥민과 오현규 같은 우리의 크랙들이 달려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수비 라인을 가르는 과감한 종패스가 배달되어야 한다. 동시에 다수의 공격수가 박스 안으로 함께 쇄도해 수적 우위를 점해야만 단단한 빗장을 풀 수 있다.

'패스를 주고 제자리에 멈춰 서는' 고질적인 습관도 당장 지워야 한다. 패스를 준 직후 끊임없이 상대의 시야 밖으로 부지런히 움직여, 동료가 나에게 다시 공을 줄 수 있는 열린 각도를 만들어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공이 오기 전부터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를 넓게 스캐닝하고, 내 발밑에 공이 닿았을 때 무엇을 할지 이미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놓는 영리함이 필요하다.

한국축구대표팀 황인범(6)이 19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월드컵 멕시코전에서 공을 잡고 공격할 틈을 엿보고 있다./과달라하라(멕시코)=KFA

◆ 공보다 먼저 움직이고, 틈이 나면 찔러라

과거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세계적인 레전드 동료들로부터 왜 그토록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받았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봐야 한다. 그가 대단했던 건 뛰어난 기술을 갖추었음에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상대 수비의 허점이 보이는 순간 폭발적인 쇄도로 빈 공간을 파괴하며 동료들의 짐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진짜 '축구 지능'은 발끝에 부리는 화려한 마술이 아니다. 경기를 넓게 읽고, 내가 공을 잡고 있지 않을 때 얼마나 위협적으로 공간을 타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다.

대한민국이 남아공이라는 높은 벽을 넘고 마지막에 웃기 위해서는, 선수 개개인의 발끝만 바라보는 정적인 축구에서 당장 탈피해야 한다. 크루이프가 강조했던 "끊임없이 생각하고 쉼 없이 움직이는 축구"의 단단한 토대 위에 과감한 전진 패스를 장착할 때, 비로소 홍명보호의 진짜 스피드가 살아나고 체력 비축과 승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기적의 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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