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배너', 시험대 오른 FIFA의 '이중잣대'[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배너' , 이번 월드컵 결승 최대변수 등장
반복되는 역사, 피치 위로 들어온 국가적 상흔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지오나니 로셀소가 16일(한국시간) 열린 잉글랜드와의 2026북중미 월드컵 준결승이 끝난 뒤 승리축하 무대에서 "말디나스(포클랜드)는 아르헨디나의 것"이라고 쓰인 배너를 펼쳐보이고 있다./ 애틀랜타(미 조지아주)=AP 뉴시스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 국제축구연맹(FIFA)을 비롯한 글로벌 스포츠 기구들은 언제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왔다. 경기장을 정치와 종교, 인종적 갈등이 끼어들 수 없는 ‘청정 구역’으로 규정하며,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실제로 16일(한국시간) 2026 북중미 월드컵 준결승에서 '숙적' 잉글랜드를 2-1 역전승으로 따돌리고 두 대회 연속 결승행을 이뤄낸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중대한 징계 위기에 직면했다. 이날 경기가 끝난 뒤 가진 자축 무대에서 아르헨티나 한 선수가 ‘말비나스(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것" 이라고 쓰여진 배너를 펼쳐 든 것이다. 전례와 규정에 비추어 볼 때, FIFA의 본격적인 조사와 이에 따른 징계 절차는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승전을 앞두고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대형 악재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스포츠와 정치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모호하며, 해석하기 까다로운 회색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오랜 난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2012년 8월11일 런던올림픽 축구 한국과 일본의 3·4위전 경기 후 올림픽 대표팀 박종우(사진)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그라운드를 누벼 동메달 수상이 보류되기도 했다. /올림픽공동취재단(더팩트DB)

◆ 정치적 확성기… 규정과 감정의 아슬아슬한 충돌

축구장은 때로 선수들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국가적 기억을 드러내는 거대한 확성기가 되곤 했다. 이날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지오바니 로 셀소가 펼쳐 든 포클랜드 배너는 축구장 안으로 들어온 거대한 역사적 상흔이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박종우의 '독도 세리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3,4위전 직후 관중이 건네 준 "독도는 우리 땅" 종이를 들었던 박종우는 올림픽 헌장 제50조 위반으로 시상식 제외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승리 직후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관중이 준 문구를 일시적으로 들었을 뿐, 선수 본인이 사전에 기획하거나 의도한 '정치적 성명'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이 배너 역시 관중석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스위스와의 8강전이 끝난 뒤 일부 선수들이 "말비나스(포클랜드의 아르헨티나명)를 위해, 마라도나를 위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데 이어 벌어진 일이다. 우발적 해프닝이라기보다 팀 차원의 의도적인 메시지 표출로 해석될 여지도 있어, 과거 사례보다 FIFA가 훨씬 더 엄격한 징계를 내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 이전에도 스포츠 현장에서의 정치적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에는 코소보 출신의 스위스 선수들이 세르비아의 탄압을 받았던 코소보의 독립을 옹호하며 ‘쌍두 독수리 세리머니’를 펼쳐 징계를 받은 바 있고, 그에 앞서 1997년에는 리버풀의 전설 로비 파울러가 컵 대회에서 골을 넣은 후, 당시 파업 중이던 리버풀 부두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티셔츠 문구를 노출했다가 UEFA로부터 벌금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국가적 감정, 영토 분쟁, 혹은 사회적 갈등이라는 민감한 내러티브가 스포츠라는 세계적인 무대와 충돌했을 때 일어난 파장이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의 육상선수 토미 스미스(가운데)와 존 카를로스(오른쪽)가 남자 단거리 200m 경주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뒤 시상대 위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 위로 들어올리고 있다. /AP 뉴시스

◆ 역사의 심판은 또 달랐다! 당대의 처벌과 후대의 재평가

스포츠계의 이 오랜 충돌은 당대의 엄격한 처벌이 훗날 전혀 다른 역사적 평가를 받는 복잡한 궤적을 그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당시 미국의 육상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의 ‘검은 주먹 세리머니’다. 1968년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 등 미국 내 흑인 민권 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시상대 위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흑인 인권 현실에 저항하며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었던 이들은, 당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정치적 중립 훼손'을 이유로 선수촌 추방 및 선수 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가혹한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국제 사회에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훗날 인권 신장에 기여한 위대한 저항으로 역사적 재평가를 받으며 명예가 온전히 복원되었다. 경기장 내 정치적 행위에 대한 규정 집행과 별개로, 피치 위 메시지가 지닌 역사적 무게를 단선적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21년 12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날-사우스햄턴 경기에 앞서 선수들이 무릎꿇기 세리머니를 하며 인종차별 반대의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다./런던(영국)= AP 뉴시스

◆ 경계의 모호함: 보편적 가치와 정치적 잣대의 이중성

실제로 스포츠 기구들의 잣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사뭇 다르게 해석되어 왔다. 2020년 전 세계 축구장을 뒤덮은 ‘무릎 꿇기' 세리머니 당시, FIFA는 규정상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이 행위를 '인류 보편의 가치'라며 전면 허용하기도 했다.

2020년 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사건 이후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자,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한 전 세계 축구선수들이 경기 시작 직전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는 세리머니를 시작했고, 원래 규정대로라면 이 역시 경기장 내 '정치적 행위'로 제재 대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여론과 스폰서들의 움직임을 의식한 FIFA는 이를 처벌하는 대신 "인종차별 반대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라며 이례적으로 전면 허용하는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FIFA가 영토 분쟁 등에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면서, 일부 대형 이슈에는 '보편적 가치'라는 명분으로 규정을 유연하게 적용한다는 이중잣대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도 했다.

이번 2026 월드컵 역시 대회를 국가적 쇼케이스로 활용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이나 미국대표팀 스트라이커 발리건의 퇴장 징계를 둘러싼 정치 권력의 개입 징후들 앞에서는 정치적 중립 조항이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의제는 징계 대상이 되고 어떤 의제는 용인되는지, 그 경계를 정의하는 과정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모호함이 이 영역의 해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아르헨티나 팬들이 16일(한국시간) 열린 2026북중미 월드컵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간의 준결승이 열리는 동안 관중석에서 "말비나스(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의 것"이라고 쓰인 배너를 펼쳐들어보이고 있다./ 애틀랜다(미 조지아주)=AP 뉴시스

◆ 무너진 중립, 피치 위의 서글픈 환상

이번 아르헨티나의 배너 사건은 국제 스포츠 기구가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마주한 오랜 난제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선례와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아르헨티나 선수단의 명백한 규정 위반 행위에 엄격한 처벌을 내리는 것은 피하기 힘들 것이다.

결승전을 앞둔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에 과연 FIFA가 어떤 처분을 내릴지는 이번 대회 막판의 가장 뜨거운 화두다. 하지만 설령 FIFA가 아르헨티나에 단죄를 내린다 한들, 이를 원칙의 승리로 바라보는 시선은 드물 것이다. 이미 미국 대표팀의 징계를 번복했던 ‘발로건 사태’에서 보듯, 현실 정치의 거대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굴종하면서 피치 안의 선수들 위에만 서슬 퍼렇게 군림하는 그들의 기만적인 ‘이중잣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서글픈 증명서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스포츠가 거대 권력의 쇼케이스이자 가장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무대로 전락한 지금, ‘모두에게 일관된 공정함’이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은 피치 위의 가장 슬픈 환상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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