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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올 시즌 강력한 ‘하이 프레싱’을 앞세워 공격지역 점유율 1위를 달리는 강원FC. 그 거침없는 질주를 멈춰 세운 것은 거액을 투입한 빅클럽도, 화려한 국가대표 출신의 스타 감독도 아니었다.
K리그1에서 올시즌 가장 매서웠던 강원의 기세를 먼저 꺾은 것은 지난 시즌 승격팀 FC안양(2-1 승)이었고, 며칠 뒤 올시즌 승격팀 부천FC가 3-0 완승으로 그 흐름을 이어받았다. 공교롭게도 두 팀 벤치에는 모두 같은 실업팀 출신 지도자가 앉아 있었다.
한국 실업축구의 명문 국민은행 까치가 길러낸 '비주류 지도자들'이었다. 선수 시절에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뛰었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 K리그1 전술 경쟁의 가장 뜨거운 중심에 서 있다.
국민은행은 1983년 프로축구(슈퍼리그) 출범 이전까지 국내 최정상을 다투던 실업축구 명문이었다. 프로화를 선택하지 않은 뒤에도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한국 축구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성남 일화의 황금기를 이끈 김학범 감독을 비롯해 현재 K리그1에서 활약하는 유병훈(FC안양), 이영민(부천FC), 이정규(광주FC) 감독을 길러낸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 프로 커리어 '0경기'와 '1골'… '준비'로 채운 비주류의 설움
이들의 공통점은 국민은행 출신이라는 사실보다 '비주류 선수'였다는 데 있다. 국가대표 스타 플레이어도 아니었고, 프로 무대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지도 못했다. 이영민 감독은 프로리그 공식 출전 기록이 단 한 경기조차 없고, 유병훈 감독 역시 부산 대우 시절 10년 동안 단 1골을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대신 두 사람은 국민은행 유니폼을 입고 내셔널리그 정상에 오르며 묵묵히 팀을 떠받쳤다. 화려한 재능에 의존하기보다, 치열한 야전에서 살아남는 법을 몸으로 먼저 배운 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지도자가 된 뒤에도 이들의 진짜 무기는 이름값이 아닌 '지독한 준비'였다. 막내 이정규 감독은 이영민 감독이 코치를 맡아 지도자로 첫걸음을 뗐을 때 국민은행에 선수로 입단했다.
국민은행 시절 선후배였던 이영민 감독과 유병훈 감독은 지도자로도 '사수와 부사수'로 호흡을 맞췄다. 고양 KB국민은행 코칭스태프를 거쳐 FC안양에서도 함께 벤치를 지켰고, 이후 각각 부천과 안양의 사령탑으로 독립했다. 유병훈 감독이 2024시즌 K리그2 우승으로 안양의 창단 첫 승격을 이끌자, 이영민 감독 역시 지난 시즌 부천을 K리그1 무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해 '국민은행 사령탑 시대'를 열었다.
이제 두 사람은 국내 최상위 무대에서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라이벌로 마주한다. 올 시즌 두 차례 맞대결 전적은 1승 1패. 흥미로운 점은 두 번의 승리 모두 '상대 팀 안방'에서 거둔 원정 승리였다는 사실이다. 끈끈한 서사 속에서도 타협 없는 치열한 수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다.

◆ 기존 질서 흔드는 맞춤형 '전술 해킹'
국민은행 출신 지도자들의 진가는 선수 시절의 화려한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선수 시절 부족했던 것을 철저한 분석과 공부로 메웠던 습관이 지도자가 된 뒤 독보적인 경쟁력이 됐다. 상대 전술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맞춤형 전략, 제한된 스쿼드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조직력, 경기마다 달라지는 세밀한 플랜은 이들이 K리그1에서 거센 존재감을 발휘하는 가장 큰 이유다.
K리그1은 오랫동안 국가대표 출신 스타 플레이어들이 지도자 자리까지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구조가 강했다. 이름값과 학벌, 인맥으로 얽힌 정체된 커넥션이 지배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훌륭한 스타 출신 지도자도 많지만, 국민은행 출신 감독들은 '또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스타가 아니어도 된다. 치열하게 연구하고 준비하면 리그 전체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좋은 선례가 되고 있다.

◆ '무적' 강원 꺾은 연쇄 저격, 그리고 안양·부천·광주의 삼자 행보
특히 주목할 것은 올 시즌 강력한 전방 압박과 폭발적인 공격력을 앞세워 K리그1 선두까지 넘보던 강원FC의 무서운 상승세를 꺾어버린 주역이 바로 안양, 부천 두 팀이라는 점이다. 사실 올해 강원의 페이스는 무적에 가까워 과연 누구의 손에서 질주가 멈출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엔진을 꺼뜨린 것이 국민은행 형제들이었다. 지난달 26일, 안양이 2-1로 강원의 9경기 연속 무패 행진에 제동을 걸었고, 지난 1일에는 부천이 바통을 받아 3-0 셧아웃 대승을 거두며 연이어 충격을 안겼다. 우연이 아닌, 상대를 집요할 만큼 세밀하게 분석하고 약점을 매섭게 공략하는 이들의 축구 철학이 만들어낸 성과다.
물론 현장의 모든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승격팀으로 지난 시즌 K리그1 잔류에 성공한 안양 유병훈 감독은 올시즌 상위권 경쟁을 이어가고 있고, 올해 승격 첫 시즌을 맞아 잔류의 중압감 속에 늘 미간을 찌푸리던 부천 이영민 감독 역시 이날 강원전 대승을 계기로 팀의 존재감을 한층 키웠다.
선두권 강원을 3-0으로 완파한 날, 그는 두 팔을 하늘 높이 번쩍 들며 모처럼 환한 미소를 터뜨렸다. 올해 수원삼성으로 떠난 이정효 감독 후임으로 급하게 광주FC 사령탑을 맡게 된 이정규 감독은 아직 승수가 부족해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치밀한 전술과 집념이라는 국민은행 지도자 특유의 색깔만큼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 K리그 벤치에 살아 숨 쉬는 '조용한 유산'
국민은행 까치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팀이다. 그러나 그 팀이 한국 축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우승 트로피도,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도 아니다. 이름보다 준비를, 인맥보다 실력을 믿었던 지도자들이다.
한국 축구는 오랫동안 선수의 명성이 지도자의 자격을 보증하는 문화에 익숙했다. 그러나 국민은행 출신 감독들은 판도를 뒤흔들며 다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지도자의 가치는 선수 시절의 화려함이 아니라, 피치 밖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국민은행 까치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축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K리그1 벤치 위에서 뜨겁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름보다 준비를, 인맥보다 실력을 믿는 축구’라는 그들의 조용한 유산은 오늘도 K리그의 판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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