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강인이 한국축구를 대신해 고개 숙여야 하나 [박순규의 창]

축하받아야 할 ATM 데뷔전에서 “반성하고 있다”…책임의 주체가 뒤바뀐 씁쓸한 현실

2026 쿠팡플레이 시리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가운데 경기를 마친 이강인이 인터뷰 하고 있다./서울월드컵경기장=박헌우 기자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하받아야 할 날이었다. 새로운 유니폼, 새로운 등번호, 새로운 무대. 한국 축구의 간판 이강인(25)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붉고 흰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그라운드를 밟은 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그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여야 했다.

하지만 경기 뒤 믹스트존에 선 이강인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 중심은 자신의 데뷔나 앞으로의 꿈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였다. "지금 한국 축구가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선수들은 많은 축구 팬분들께 기쁨을 드리고 싶어서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반성하고 있다."

왜 스물다섯 살 선수가 한국 축구를 대신해 ‘반성’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참사에 이어 정몽규 회장과 홍명보 감독의 잇따른 사퇴,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난 축구 행정의 난맥상, 여기에 협회를 둘러싼 심판 성접대 의혹까지 불거졌다. 말 그대로 한국 축구는 사상 최악의 ‘초상집’ 분위기다. 행정은 사실상 멈춰 섰고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무너졌으며, 팬들의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더 씁쓸한 것은 정작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아닌, 피치에서 뛰어야 할 선수가 팬들 앞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650억 원에 달하는 이적료를 기록하며 스페인의 명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해 세계적인 명장 디에고 시메오네의 지도를 받게 된, 축하받아 마땅한 자신의 새로운 출발점에서였다.

새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꿈을 이야기하기에도 모자란 날, 한국 축구의 차세대 에이스는 자신의 미래보다 추락한 한국 축구를 먼저 걱정했다. "선수들도 많이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다"며 팬들에게 다시 한번 관심과 사랑을 부탁했다. 사실상 "한국 축구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호소처럼 들렸다.

2026 쿠팡플레이 시리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가운데 이강인이 공격에 참여하고 있다./서울월드컵경기장=박헌우 기자

한국 축구의 기념비적인 새 출발을 알리는 이강인의 잔칫날이, 어느 순간 무너진 한국 축구를 대신해 스물다섯 살 선수가 사과하고 팬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하는 자리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과 위로받아야 할 사람, 사과해야 할 사람과 미래를 향해 뛰어야 할 사람이 뒤바뀐 한국 축구의 현실이 그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강인은 2026 북중미월드컵 참사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선수는 아니다. 대표팀 구성원으로서 경기력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월드컵 실패 이후 불거진 감독 선임 논란과 축구협회 행정 난맥,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난 책임 회피, 최근까지 이어지는 각종 추문까지 선수들이 등에 짊어져야 할 몫은 아니다.

경기의 책임과 행정의 책임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축구에서는 그 경계가 무너졌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진 자리를 선수가 대신 채우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The buck stops here(최종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뜻)"라는 문구를 올려놓았던 해리 트루먼의 말처럼 조직의 최종 책임은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서 멈춰야 한다. 권한은 위에서 행사하면서 책임은 아래로 흘려보내는 조직은 오래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날 이강인의 모습은 한국 축구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5만 78명의 관중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아틀레티코의 새 7번 이강인이 후반 그라운드에 등장하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이 터졌다. 프리킥 키커로 나섰고, 좁은 공간에서 특유의 탈압박과 패스를 선보이며 새 팀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2026 쿠팡플레이 시리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가운데 이강인이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지시를 받고 있다./서울월드컵경기장=박헌우 기자

그런데 정작 경기 뒤 그는 자신의 미래보다 한국 축구를 걱정했다. "안 좋은 부분만 봐주시지 마시고 좋은 부분도 봐주셨으면 좋겠다."

한국 축구를 향해 돌아선 팬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간절한 호소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씁쓸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축구에서 이강인과 손흥민 같은 선수들은 경기만 잘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됐다. 경기에서 골을 넣어야 하고, 팬들의 마음도 달래야 하고, 대표팀 분위기도 추슬러야 하며, 때로는 행정 실패로 무너진 신뢰까지 복원해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됐다.

하지만 선수에게 그 짐까지 맡겨서는 안 된다. 선수는 피치에서 책임지면 된다. 잘하면 박수를 받고 못하면 비판을 받는 것이 프로 스포츠다. 반면 감독 선임의 공정성, 대표팀 운영의 원칙, 협회 행정의 투명성과 윤리는 축구 행정가들이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이날 이강인의 인터뷰 가운데 오히려 한국 축구가 귀담아들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이강인은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에 대해 "그 위치에서 공격적으로 하는 것을 원하셨다"며 "확실하게 이야기해주셔서 선수로서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짧은 말이지만 울림은 컸다. 세계적인 명장 시메오네는 새로 합류한 선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말했다. 역할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선수는 그 역할을 수행한다.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공자는 '논어'에서 "명불정즉언불순(名不正則言不順)"이라고 했다. 이름과 역할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축구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 아닐까. 누가 대표팀의 미래를 설계하는가. 누가 실패에 책임지는가. 누가 축구협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가. 그 역할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아틀레티코에서는 시메오네 감독이 이강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줬다. 이제 한국 축구도 스스로 답해야 한다. 선수에게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강인의 역할은 한국 축구를 대신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피치 위에서 뛰고, 골을 만들고, 팬들에게 다시 축구의 즐거움을 돌려주는 것이다.

한국 축구의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일은 스물다섯 살 이강인의 몫이 아니다. 그 짐까지 선수에게 지우는 순간, 한국 축구는 또 한 번 책임의 순서를 거꾸로 세우게 된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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