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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코리아
[투어코리아=박은하 기자] 북마리아나제도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로 30분. 활주로에 내리는 순간,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섬 전체가 고요해졌다. 사이판이 한적한 여행지라면, 로타는 그마저도 번잡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곳이다. ‘마더 아일랜드’라는 별명처럼, 이 섬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태평양의 원형을 품고 있다.
북마리아나제도 로타섬은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로 약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사진- 박은하 기자로타 블루 위를 나는 새들, 버드 생추어리
로타섬 북동쪽 해안에 자리한 버드 생추어리(Bird Sanctuary)는 절벽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전부인 소박한 보호구역이다. 그러나 걷기 시작하면 이내 발걸음이 느려진다. 나무 위에는 흰제비갈매기(White Tern)들이 자리하고 있고, 마리아나 과일박쥐(Mariana Fruit Bat)가 절벽과 바다 사이를 가로지른다.
버드 생추어리에서 마리아나 과일박쥐가 절벽과 바다 사이를 자유롭게 활공하고 있다./ 사진- 박은하 기자연중 건기인 12월~5월이 새 관찰에 유리한 시기다. 독특한 형태의 절벽 아래로는 로타에서만 볼 수 있는 짙은 청색, ‘로타 블루’가 빛난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평온함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절벽과 숲, 바다가 이어지는 버드 생추어리 풍경(왼쪽) 위로 마리아나 과일박쥐 두 마리가 유유히 활공한다(오른쪽)./ 사진- 박은하 기자천연 수영장에서 거센 파도까지, 스위밍홀의 두 얼굴
로타섬 남동쪽 해안에는 로타 블루에서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해안 명소인 스위밍홀(The Swimming Hole)이 있다. 오랜 시간 파도에 의해 석회암이 깎이며 형성된 이곳은 천연 수영장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지형이다. 본래는 잔잔한 물결과 투명한 푸른 바닷물이 어우러져 물놀이에 적합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석회암 절벽 사이로 파도가 밀려드는 스위밍홀. 잔잔함과 거친 바다가 동시에 드러나는 로타의 자연 풍경이다./ 사진- 박은하 기자그러나 방문 당일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절벽 아래로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지고, 짠 바닷바람이 피부에 닿는다. 검게 젖은 석회암 바위 위로 하얀 포말이 연이어 터진다. 평온함 대신 자연의 힘이 드러난, 또 다른 얼굴의 스위밍홀이었다.
거센 파도가 스위밍홀의 바위를 세차게 때리며 물보라를 터뜨린다./ 사진- 박은하 기자두 바다 사이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삶, 송송빌리지 전망대
로타섬 남서쪽 해안에 자리한 송송빌리지(Songsong Village)는 왼쪽으로는 필리핀해, 오른쪽으로는 태평양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중심 도로를 따라 행정기관과 학교, 성당, 슈퍼마켓 등 생활시설이 모여 있는 로타 주민들의 생활 공간이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낮은 건물 사이로 잔잔한 공기가 흐르고, 멀리서는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송송빌리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송송빌리지. 필리핀해와 태평양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다./ 사진- 박은하 기자로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송송빌리지 전망대에 올랐다. 시야 끝으로는 섬의 끝자락에 우뚝 선 웨딩케이크 마운틴(Wedding Cake Mountain)이 눈에 띄었다. 층층이 깎인 독특한 실루엣이 멀리서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왼쪽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삼각형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싸움닭 캠프였다. 로타에서 투계는 단순한 민간 풍습이 아닌 정식 스포츠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장난감처럼 오밀조밀한 마을 풍경 속에서, 예상치 못한 로타의 일상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송송빌리지 일대의 투계장이 내려다보이고(왼쪽), 전망대에는 마을의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오른쪽)./ 사진- 박은하 기자전망대 중앙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 십자가는 매년 주민들이 성당에서부터 직접 이고 지고 올라와 세운 것으로, 부활절 전 성주간마다 새로운 십자가로 교체된다고 한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십자가 주변에는 바람 소리만 맴돌고 있었다. 말없이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십자가가, 이 마을이 오랫동안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 섬사람들의 맛, 테테토 비치의 차모로 바베큐
로타를 대표하는 해변 테테토 비치(Teteto Beach)는 야자수 그늘 아래 백사장이 펼쳐진 곳으로, 현지인과 여행자가 함께 어울리는 생활 해변이다. 이곳에서 차모로(Chamorro) 바베큐를 즐겼다. 코코넛 열매를 먹고 자란다는 코코넛크랩은 한 마리에 20만~30만원대를 웃도는 귀한 갑각류지만, 로타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다.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상품으로 판매하기보다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활 방식이다. 그 모습에서 자연을 존중하며 공존하려는 로타 사람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차모로 바베큐가 차려진 식탁과 코코넛크랩 요리(왼쪽), 한 접시에 담긴 로타식 식사(오른쪽)./ 사진- 박은하 기자코코넛크랩은 집게 힘이 강해 손질 전 집게발을 먼저 단단히 결박한 뒤 등껍질을 분리한다. 현지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되지만, 코코넛 밀크에 마늘과 양파를 넣고 몇 시간에 걸쳐 뭉근히 끓여내는 요리가 대표적이다. 서두르지 않는 로타의 시간처럼, 천천히 완성되는 음식이다. 꼬리 쪽의 얇은 막을 걷어내고 내장을 한 스푼 떠 맛보니 성게알과 대게 내장을 섞은 듯한 녹진한 풍미와 쌉쌀한 끝맛이 어우러진다. 여기에 차모로식 레드라이스(Red Rice)에 크랩의 살과 내장이 우러난 국물을 곁들이니, 로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국적이면서도 현지적인 맛이 완성된다.
코코넛크랩을 손질하는 모습(왼쪽), 내장을 맛보는 장면(가운데), 차모로식 레드라이스(오른쪽)./ 사진- 박은하 기자차모로 바베큐의 대표 메뉴인 숏립을 비롯해 블루피쉬, 닭다리, 생참치 포케, 로타 고구마와 레드라이스까지. 한 접시 안에 로타의 바다와 땅이 모두 담겨 있었다.
머나먼 태평양에서 마주한 우리의 역사, 재패니즈 캐논
해안 절벽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울창한 가로수 길을 지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구조물과 마주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로타섬에 주둔하며 미군의 해상 접근을 막기 위해 구축한 해안 방어 시설, 재패니즈 캐논(Japanese Cannon)이다.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진 가로수길. 평온한 풍경 뒤로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진- 박은하 기자로타섬은 사이판이나 티니안처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전쟁 유물들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으며, 섬의 자연과 주민들의 생활 터전 역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포대 뒤편으로 이어진 터널.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인이 동원돼 조성된 공간이다./ 사진- 박은하 기자이 시설은 절벽을 파내 콘크리트 벙커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내부에는 또 다른 터널이 이어져 있다. 섬의 다른 방어 거점과 연결하기 위해 조성된 이 터널에 한국인이 강제 동원됐다는 사실은, 이곳이 단순한 전쟁 유물을 넘어 우리의 아픈 역사와도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머나먼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마주한 그 사실이, 발걸음을 잠시 붙잡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한 포대에서 바라본 로타의 바다./ 사진- 박은하 기자벙커 안에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두자, 절벽 아래 펼쳐진 풍경은 평화롭기만 했다. 그러나 이 고요함이 한때 적의 함선을 기다리던 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떠올리는 순간, 눈앞의 풍경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전쟁의 상처도 품어주는 자연, 통가 케이브
푸른빛을 띠는 잿빛 석회암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뾰족한 종유석과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든 물웅덩이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자연 동굴이 아니다.
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야전병원으로 사용했던 통가 케이브(Tonga Cave)다. 암벽이 쩍 갈라져 만들어진 삼각형의 깊은 입구를 지나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내부 공간은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다. 인위적으로 다져진 동굴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이 만든 공간이지만, 사람의 손길이 분명히 닿았던 흔적이다.
흐르는 물소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전쟁의 긴박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동굴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 긴 시간을 아무 말 없이 기록하고 있는 듯했다.
통가 케이브 내부 전경(왼쪽)과 물방울이 빚어낸 석회암 지형(오른쪽)./ 사진- 박은하 기자오브리 호코그 로타 시장은 “로타는 다른 섬에 비해 더 고립되어 있고,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매력을 지닌 곳”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로타는 문명의 손길이 최소한으로 닿은 북마리아나제도의 보석 같은 섬이었다. 자연에 스며들 듯 살아가는 사람들, 필요한 만큼만 취하며 자연에 감사하는 삶, 그리고 전쟁의 흔적마저 품고 있는 풍경까지. 그 모든 시간이 켜켜이 쌓여 로타의 자연은 더욱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경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로타의 해안선. 떠나는 순간까지 시선을 붙잡는 ‘로타 블루’가 이어진다./ 사진- 박은하 기자사이판으로 돌아가는 경비행기가 고도를 높이자, 로타의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푸른빛으로 일렁이던 ‘로타 블루’가 시야 끝까지 이어졌다. 그 풍경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그 여운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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