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 2주째 안 떨어져요"…해열제 무용지물이라면 이 병 의심해야
건국대병원 종양혈액내과 이홍기 교수건국대병원 종양혈액내과 이홍기 교수

[투어코리아=최인철 기자] 병원을 찾는 환자 중 상당수는 고열과 오한을 감기나 독감으로 여기고 가볍게 넘긴다. 그러나 시중에 파는 해열제를 먹어도 체온이 떨어지지 않고, 몸 곳곳에서 이상 신호가 동시에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의료계에서는 이런 경우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을 반드시 감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HLH는 국내에서도 병명 자체를 아는 사람이 드문 희귀 난치 질환이지만, 일단 발병하면 수일 안에 생명을 위협할 만큼 진행이 빠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면역세포는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나 세균을 탐지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HLH(Hemophagocytic Lymphohistiocytosis)에서는 이 과정이 완전히 뒤틀린다. 대식세포와 T세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정작 없애야 할 외부 적 대신 우리 몸 안의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을 닥치는 대로 흡수·파괴하기 시작한다.

건국대병원 종양혈액내과 이홍기 교수는 "면역 반응이 일단 시작되면 스스로 멈추는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가 되는 것이 HLH의 핵심"이라며 "이 과정에서 분비되는 대량의 사이토카인이 폭풍처럼 전신을 휩쓸며 간, 폐, 뇌 같은 주요 장기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남긴다"고 말했다.

HLH는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지만, 발병 원인은 연령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신생아나 영유아에서는 특정 유전자에 선천적인 결함이 있을 때 발병하는 '일차성' 형태가 대부분이다. 반면 성인에서는 체내 감염이나 악성 종양, 자가면역 이상이 도화선이 되는 '이차성'이 주를 이룬다. 특히 EB바이러스 같은 바이러스 감염이나 림프종 등 혈액 관련 암이 HLH를 유발하는 경우가 성인에서 빈번하게 보고된다.

이홍기 교수는 "암 치료를 받았거나 현재 받고 있는 환자, 또는 면역 기능이 저하된 중장년층은 발열 증상이 길어질 때 HLH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HLH가 단순 발열 질환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여러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피부나 눈 흰자가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기거나, 별다른 이유 없이 피부 여기저기에 멍이 생기고 작은 상처에도 피가 잘 멈추지 않는다면 혈소판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여기에 빈혈로 인한 심한 어지럼증과 탈진에 가까운 무기력감이 겹치고, 배 위쪽을 눌렀을 때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느낌이 든다면 간이나 비장이 이미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38.5도를 웃도는 고열이 1주일 이상 지속되는데도 해열제가 전혀 듣지 않는 경우, 이 모든 증상과 맞물린다면 즉시 종양혈액내과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

HLH 진단은 일반 혈액 검사만으로는 부족하다. 철분 저장과 관련된 단백질인 페리틴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있는지, 혈중 중성지방이 급등했는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확진을 위해서는 골수 검사가 필수적이다. 골수 안에서 대식세포가 혈구를 직접 잡아먹는 장면을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치료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진단 즉시 면역억제제와 스테로이드를 투여해 걷잡을 수 없이 활성화된 면역 반응을 억누르고, 발병의 근본 원인이 된 감염이나 종양에 대한 치료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유전적 소인이 확인되거나 재발 위험이 높은 환자에게는 조혈모세포 이식이 장기적인 해결책으로 고려된다.

이홍기 교수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장기 손상은 멈추지 않는다"며 "의심 단계에서부터 전문의와 긴밀하게 논의하며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치료 결과를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HLH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백신이나 예방약은 아직 없다. 다만 이차성 HLH의 상당수가 바이러스 감염을 계기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평소 감염 자체를 줄이는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 손 씻기 등 기본 위생 수칙 준수, 단백질 위주의 균형 잡힌 식사, 충분한 수면을 통한 면역력 관리가 현실적인 예방 전략이다.

이홍기 교수는 "생소한 이름 탓에 진단받은 뒤 패닉에 빠지는 환자가 많지만, 전문의 주도 하에 치료 계획을 세우고 일찍 시작할수록 예후는 분명히 달라진다"며 "2주 이상 열이 잡히지 않는다면 그 자체를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전문가를 찾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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