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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호와 서건창(사진=키움)[더게이트=고척]
정신분석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애도’가 상실을 상징화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가령 장례식은 죽음을 연극적으로 재연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음으로부터 상징적 거리를 확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애도의 과정이 생략되면 마치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처럼 남은 자는 페티시와 증상 사이에서 표류하며, 상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야구선수의 은퇴식도 이와 같다. 선수의 은퇴식은 현역 은퇴라는 일종의 상실을 의례적으로 재연함으로써 팬과 선수 모두가 그 상실을 감당 가능한 것으로 전환하는 장치가 된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선수를 제대로 보내주지 못하면 팬들은 상실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때로는 선수의 은퇴에 대한 분노와 구단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거나 말로는 은퇴를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무의식에서는 부인하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은퇴식은 선수 본인은 물론 선수를 응원한 팬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행사다. 은퇴한 선수가 — 이미 은퇴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할지라도 — 직접 그라운드에 서서 은퇴를 선언하는 연극적 재현은 상실을 실재의 충격에서 상징의 질서로 옮겨 놓는다. 그제서야 팬들은 비로소 애도를 시작하고, 선수를 마음에서 진심으로 보내줄 수 있게 된다.
은퇴식은 선수 한 명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다. 주인공은 선수 본인이지만, 오랜 세월 선수를 응원하며 함께 울고 웃은 팬들도 은퇴식을 함께 만드는 주역이다. 여기에 선수의 데뷔 시절부터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동료, 선배, 후배, 지도자들이 함께 추억을 공유하면서 은퇴식들 둘러싼 의미는 한층 풍성해진다.
박병호의 은퇴식 행사(사진=키움)
박병호의 은퇴식 행사(사진=키움)
박병호의 은퇴식 행사(사진=키움)
‘승리, 영웅 박병호’…고척돔에 모인 사람들
26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박병호 키움 히어로즈 잔류군 선임코치의 은퇴식 ‘승리, 영웅 박병호’에서도 그런 장면이 펼쳐졌다. 박병호가 오랫동안 몸담은 팀 키움과 마지막 2년을 함께한 삼성의 경기에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키움 팬들은 선수 박병호의 마지막을 눈물과 박수, 웃음과 환호로 배웅했다. 박병호의 가족은 물론 옛 동료와 현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웠던 시절의 추억을 나눴다.
은퇴식이 열린 이날 아침 일찍부터 고척스카이돔 주변에는 박병호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렸다. 삼성 팬 중에도 박병호 유니폼을 입은 이가 적잖게 보였다. 키움은 이날 고척돔을 찾는 팬들에게 박병호 은퇴 기념 티셔츠 7000장을 선착순으로 증정했다. 사전에 선정된 키움 팬 52명과 연간회원 52명 등 총 104명을 대상으로 팬 사인회도 열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회견과 팬 사인회로 시작된 일정은 오후 1시 15분부터 그라운드 행사로 이어졌다. 전광판에는 박병호의 프로 여정을 함께한 지도자, 선배, 후배, 동료들의 축하와 응원 메시지가 차례로 흘렀다. 박병호가 히어로즈로 이적한 뒤 첫 사령탑을 맡았던 김시진 전 감독, ‘넥벤저스’ 전성기를 함께한 염경엽 현 LG 감독이 모습을 비췄다. 강정호, 김하성, 이정후, 송성문을 비롯해 앤디 밴헤켄, 제리 샌즈 등 전 키움 외국인 선수들도 등장했다. 반가운 얼굴이 나올 때마다 관중석에선 엄청난 환호가 터졌다.
이어 양 팀 선수단이 도열한 가운데 박병호 코치가 그라운드에 입장했다. 삼성 라이온즈 대표로 강민호와 류지혁이 나와 현역 시절 주요 성적이 기재된 기념 액자를 전달했고, 박진만 감독·이종열 단장·유정근 사장은 꽃다발을 건넸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강수현 팀장은 금 명함을 전달했다.
키움에서는 임지열·설종진 감독을 비롯해 구단 단장과 대표이사 등이 은퇴 기념 배트를 전달했다. 현역 시절 사용했던 배트 모델로 제작됐으며, 배트 받침대에는 성적 및 수상 내역을 새겼다. 약 3000만원 상당의 순금(20돈)으로 로고를 새겨 의미를 더했다. 행사 말미에는 박병호 코치의 아내와 아들이 등장해 꽃다발을 전했다.
마이크를 잡은 박병호 코치는 별도 원고 없이 은퇴사를 이어갔다. 중간중간 눈가가 촉촉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끝까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대신 얼굴 가득 미소를 띄고 관중석 구석구석에 눈길을 건네며 진심을 전했다.
박병호는 “어렸을 적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야구를 시작했다"면서 "수많은 선배님들의 은퇴식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은퇴식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그런 선수가 되게 해주시고 은퇴식을 정말 멋있게 준비해주신 키움 구단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삼성 선수로 행복한 야구를 해서 너무 좋았다. 많은 응원을 해주신 삼성 팬분들께 감사하다. 삼성과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꼭 하고 싶었는데 흔쾌히 허락해주신 삼성 구단 관계자분들과 박진만 감독, 선수들께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행복한 야구를 하고 멋있게 떠날 수 있게 됐다”고 상대팀 삼성에도 감사를 전했다.
키움 팬들을 향해선 “히어로즈 팬분들. 제가 선수 마지막 유니폼을 삼성 유니폼 입고 은퇴한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너무 슬퍼하셨는데요. 내가 다시 히어로즈에서 코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 히어로즈 팬들의 응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동안 선수 박병호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는 코치로서 좋은 선수를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은퇴사를 마무리한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박병호가 은퇴사를 이어가는 동안 오히려 관중석의 팬들과 키움·삼성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키움 에이스 안우진은 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연신 손으로 훔쳤고, 삼성 에이스 원태인도 눈시울이 뜨거워진 모습이었다. 선수생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최형우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박병호의 은퇴사를 지켜봤다.
박병호의 은퇴식 행사(사진=키움)
박병호의 은퇴식 행사(사진=키움)
박병호의 은퇴식 행사(사진=키움)
아들의 시구, 그리고 마지막 선발 출전
은퇴사를 마친 박병호는 절친인 강민호 등과 활짝 웃으며 포옹을 나누고 양팀 선수단과 기념촬영을 진행했다. 이어 박병호의 아들이 마운드에서 시구하고, 박병호가 시타자로 나서 행사를 이었다. 운동선수는 아니지만 마운드 거리에서 정확하게 포수 미트까지 공을 던진 국민거포 2세에게 큰 박수가 쏟아졌다.
경기 전 행사가 마무리된 뒤, 키움 팬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시간이 왔다. 이날 특별엔트리로 1군 선수단에 등록한 박병호가 선발 라인업에 4번타자 1루수로 이름을 올린 것. 박병호는 선발 투수 박준현에게 직접 경기구를 건넸다. 키움 관계자는 “마지막 경기를 마친 선배가 데뷔전 선발 투수인 후배에게 공을 전달하며 세대교체와 미래를 응원하는 의미”라고 전했다. 박준현의 아버지 박석민과 절친인 박병호는 박준현이 평소 ‘삼촌’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키움 팬들은 1루수 미트를 끼고 나온 박병호를 큰 박수로 반겼다.
이어 심판이 경기 개시를 선언하자 박병호는 예정대로 임지열과 교체돼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타석에 나오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상대팀에 대한 배려와, 키움 선수로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데 의미를 둔 박병호의 선택. 키움 팬들은 물론 삼성 팬들까지 모두 기립박수로 선수 박병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박병호가 교체되는 순간, 그라운드에는 또 한 명의 반가운 손님이 등장했다. 히어로즈의 전성기를 함께한 베테랑 서건창이 직접 꽃다발을 전달하며 감사와 존경을 표한 것이다. 손가락 부상으로 현재 퓨처스리그에서 재활 중인 서건창은 박병호 은퇴식을 위해 이날 고척돔을 직접 찾았다.
서건창은 구단을 통해 “오랜만에 그라운드에서 병호형과 만나니 형과 함께 정말 재밌게 야구했던 기억이 났다. 멋진 선수들, 멋진 팬들과 함께 써 내려갔던 많은 서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고 그날을 돌아봤다. 이어 “떠나보내는 마음이 아쉽다. 워낙 좋은 선수였고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코치님,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배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아마도 이날 박병호의 은퇴식을 함께한 모든 이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히어로즈의 4번타자 박병호는 그렇게 선수로서 마지막 순간을 팬들과, 동료들과 함께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팬들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박병호를 보낼 수 있게 됐다. 영원한 히어로즈의 4번타자로 가슴에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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