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잠실 시구, 왜 LG가 아닌 두산 경기였을까...알고보면 '첨단' 기업 두산, 엔비디아 핵심 파트너 [배지헌의 브러시백]
젠슨 황과 박정원 회장, 엔비디아 임직원들(사진=두산)젠슨 황과 박정원 회장, 엔비디아 임직원들(사진=두산)


[더게이트=잠실]

처음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잠실야구장에서 시구자로 나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떠오른 건 두산 베어스가 아닌 LG 트윈스 홈경기였다. 아무래도 가전, 카메라 모듈, 배터리, 스마트팩토리까지 소비자와 가까운 사업이 주력인 LG가 에너빌리티, 밥캣 등 묵직한 산업재 이미지의 두산보다는 젠슨 황과 더 가까워 보였으니까.

그런데 7일 오후 잠실 마운드에 오른 황 CEO는 등번호 93번이 새겨진 두산 유니폼 차림이었다. 93번은 엔비디아 창립연도인 1993년을 뜻하는 번호다. 타석에는 두산베어스 구단주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두산 창립연도를 의미하는 96번 유니폼을 입고 들어섰다. 두 경영자가 마운드와 타석에서 마주한 순간, 시구는 단순한 야구 이벤트를 넘어 다른 무언가로 읽혔다.

박정원 회장과 젠슨 황(사진=두산)박정원 회장과 젠슨 황(사진=두산)


21세기 록스타가 잠실에 왔다

20세기의 슈퍼스타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같은 록스타였다면 젠슨 황은 21세기 버전의 록스타다. 세계적인 거물의 방문을 앞둔 잠실야구장은 경기 개시 한참 전부터 분주했다. 홈팀 두산은 중앙출입구 양편에 베어스 마스코트를 세웠고, 황 CEO가 지나갈 구단 사무실 입구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 두 개를 꺼내 진열했다. 귀빈실로 올라가는 통로에 큼직한 엔비디아 환영 메시지를 게시하고 관람석 VIP석을 말끔히 닦는 등 구장 단장에도 공을 들였다.

오후 4시 10분, 검은색 제네시스 G90이 중앙 게이트 앞에 멈췄다. 황 CEO가 내리자 수백 명의 팬이 환호성을 질렀다. 트레이드마크인 가죽 재킷 차림으로 나타난 황 CEO는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던 박 회장과 악수를 나눴다. 취재진이 두산에 주목하는 이유를 묻자 황 CEO는 "오늘 시구에 집중하겠다"고 답한 뒤 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고 귀빈실로 이동해 박 회장 등과 환담을 나눴다.

오후 5시, 두 사람이 그라운드에 나서자 관중석이 다시 들썩였다. 두산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황 CEO가 마이크를 잡았다. "코리아!" 진짜 록스타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구장을 울렸다. "여기 오게 되어 정말 좋다. 저와 제 가족을 환영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이어졌다. "엔비디아와 한국의 기술력이 함께 발전하는 중이며 여러 멋진 파트너들과 함께하기 위해 왔다"고도 했다. 끝으로 "한국 치킨을 즐기기 위해 왔다. 치맥보다 좋은 건 없다"며 웃음을 유도한 뒤 "고 코리아!"를 외치고 마운드에 올랐다.

이날 황 CEO는 두산의 외국인 투수 잭 로그에게 시구 지도를 받았다. 리그 최고의 제구력을 자랑하는 잭 로그가 지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황 CEO가 던진 공은 포수 미트를 크게 벗어나 타석에 선 박 회장의 머리 위를 통과했다. 포수 양의지가 벌떡 일어나 겨우 받아낼 정도였다. 황 CEO는 나중에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포수가 아니라 박 회장을 보고 던져서 공이 벗어났다"고 유쾌하게 둘러댔다. 두 사람은 그라운드에서 포옹을 나누고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했다.

시구를 마친 황 CEO는 엔비디아 임직원 200여 명이 자리한 1루 쪽 테이블석으로 향했다. 어린이 팬들의 사인과 사진 촬영 요청에 일일이 응했고, 종이컵에 담긴 생맥주로 건배를 제안한 뒤 단숨에 들이켰다. 맥주 판매원이 다가오자 현금 5만원을 직접 건넸다. 뜻밖의 팁을 받은 판매원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3회초가 끝나고 댄스타임이 시작되자 전광판 카메라가 황 CEO를 포착했다. 황 CEO는 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어색하지만 흥이 넘치는 춤 솜씨에 관중석에서 웃음과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황 CEO는 약 1시간 30분 동안 경기를 관람한 뒤 구장을 떠났다.

젠슨 황과 박정원 회장(사진=두산)젠슨 황과 박정원 회장(사진=두산)


우리 두산, 중공업 회사 아닙니다…첨단 기업입니다

물론 황 CEO가 두산 경기를 택한 데는 방한 일정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방한 기간인 이번 주 잠실 홈경기 6경기가 모두 두산 경기였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긴 했다. 하지만 황 CEO 수준의 경영자가 움직이는 동선에 '그냥'이란 없다. 얻을 것 없는 자리에 앉지 않고, 메시지 없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강남 치킨집, 홍대 삼겹살집, 그리고 잠실야구장까지. 보기엔 소탈해 보여도 그 안에는 치밀한 사업적 계산이 작동한다.

그렇다면 왜 두산인가. 두산은 대중의 인식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큰 기업이다. 두산 하면 흔히 떠올리는 굴뚝과 중장비 이미지는 사실 오래전 얘기다. 지금의 두산은 완연한 첨단 기업이자, 엔비디아가 핵심 기술을 직접 검증하기 안성맞춤인 현장 실험실이다.

두 회사의 파트너십은 세 가지 층위에서 맞아떨어진다. 우선 공급망이다. 두산전자BG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용 인쇄회로기판(PCB)의 핵심 소재인 동박적층판(CCL)을 공급한다. 글로벌 1위였던 타이완(대만) EMC가 차세대 칩 블랙웰 GB300 품질 검증에서 탈락한 뒤 두산이 그 자리를 채웠다. 차세대 루빈 칩 CCL 단독 공급 시나리오까지 거론된다. 충북 증평과 경북 김천 공장 가동률은 1분기 기준 이미 100%를 넘겼다. 기술 협력이 아니라 실제 매출이 발생하는 핵심 공급망 관계다.

그 다음 층에는 로봇이 있다. 엔비디아가 원하는 건 공장, 항만, 발전소 같은 산업 현장에서 로봇이 실제로 작동하며 쌓이는 데이터다. 두산밥캣의 굴착기와 두산에너빌리티의 발전소가 이 의도에 정확히 부합한다. 두산로보틱스는 협동 로봇과 산업용 휴머노이드를 개발 중인 회사다. 양사는 이미 두산로보틱스의 에이전틱 로봇 운영체제와 엔비디아의 AI 시뮬레이션 인프라를 연동하는 협력을 공식화했다. 2027년 지능형 로봇 솔루션, 2028년 산업용 휴머노이드 출시라는 구체적 로드맵도 나와 있다.

맨 아래에는 전력이 자리한다. AI 가속기가 늘어날수록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임계치에 다가선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소형모듈원전(SMR) 기술은 엔비디아 데이터센터의 장기 전력 공급원으로 검토될 수 있는 카드다. 반도체 소재, 로봇, 전력. 엔비디아가 필요로 하는 세 가지 사업 영역을 두산은 동시에 충족한다.

황 CEO는 경기장을 떠나기 전 취재진에게 "한국에서 현재 로보틱스 관련 사업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라며 "소프트웨어, AI, 제조업의 결합체가 바로 로보틱스"라고 말했다. 두산의 주력 사업을 정확하게 지목한 듯한 발언으로, 구장에 들어서기 전 받은 질문에 뒤늦게 남긴 답변이었다.

두산일두 조형물을 건네는 박정원 회장과 젠슨 황(사진=두산)두산일두 조형물을 건네는 박정원 회장과 젠슨 황(사진=두산)


이미 사전 조율 완료, 시구 이벤트는 비즈니스의 완성

양사의 파트너십은 이미 상당 부분 조율이 끝난 상태였다. 지난 4월 장녀 매디슨 황 수석 이사가 경기도 성남시 두산로보틱스 이노베이션 센터를 먼저 방문했다. CCL 공급 계약과 피지컬 AI 로드맵까지 합의를 마친 뒤 양사 총수가 이날 야구장에서 만났다. 박 회장은 황 CEO에게 '두산일두' 조형물을 건넸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쌓아 올려 산같이 커져라'는 창업 정신을 담은 조형물로, 못질 없이 나무를 끼워 맞추는 전통 방식으로 제작됐다. 양사의 파트너십이 산처럼 커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새겨졌다.

황 CEO가 한국에 올 때마다 고르는 장소와 메뉴에는 항상 비즈니스 메시지가 담긴다. 지난해 10월 강남 깐부치킨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킨에 맥주잔을 기울인 뒤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와 약 30억달러(약 4조 3500억원) 규모의 피지컬 AI 생태계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방한 첫날 홍대입구 삼겹살집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든 소주잔 뒤에도 수조원대 사업 큰 그림이 돌아갔다.

치맥이든 소맥이든, 그 자리가 야구장이든 삼겹살집이든, 황 CEO의 동선에서 '그냥'은 없다. 이날 잠실야구장도 마찬가지였다. 공을 던지고 치킨을 뜯고 댄스타임에 몸을 흔들었지만, 소탈해 보이는 이벤트의 실체는 수조원대 첨단 산업 협력의 완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젠슨 황이 던진 공은 단순한 공 하나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박정원 회장은 이날 야구단을 소유한 구단주로서 보람을 느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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