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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춘추
폴라린 발로건(사진=유튜브 화면 갈무리)[더게이트]
미국 대통령의 전화 한 통에 국제축구연맹(FIFA)의 출전 정지 처분이 하루만에 없던 일이 됐다. 세계 최고 권위의 무대인 월드컵에서 판정이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면서 공정성 논란을 자초했다.
FIFA는 6일(한국시간) 미국 축구 대표팀 공격수 폴라린 발로건에게 내려진 1경기 출전정지 처분의 집행을 1년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발로건은 지난 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32강전에서 상대 수비수 타리크 무하레모비치의 발목을 밟는 반칙으로 후반 19분 퇴장당했다. 규정대로라면 다음 경기인 7일 벨기에와의 16강전에는 출전할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FIFA 징계위원회가 갑자기 징계위원회규정(FDC) 27조를 꺼내 들며 상황을 뒤집었다.
이러한 전격적인 뒤집기 배경에는 백악관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소식통을 인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일 지안니 인판티노 FIFA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발로건의 징계를 다시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FIFA의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극우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옳은 일을 해 거대한 불의를 바로잡은 FIFA에 감사한다"고 적었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앞서 발로건의 퇴장이 억울하다며 항소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폴라린 발로건(사진=유튜브 화면 갈무리)
가린샤 이후 64년 만의 예외
FIFA가 월드컵 본선에서 레드카드에 따른 자동 출전정지를 유예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마지막 사례는 6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 칠레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레전드 가린샤가 준결승 퇴장 징계를 정치적 압력 끝에 풀고 결승전에 나선 경우가 유일하다. 반세기 넘게 사라졌던 정치 외압이 공교롭게도 이번 대회 공동 개최국인 미국의 간판 선수에게 다시 동원됐다.
FIFA는 이번 결정의 근거로 징계위원회규정 27조를 들었다. 사법기구는 징계 처분의 전부 또는 일부 집행을 유예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대상자는 1년에서 4년까지 유예 기간에 놓인다는 조항이다. FIFA는 지난해 11월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받은 3경기 출전정지 중 2경기를 유예해준 전례가 있고, 올해 4월에도 아르헨티나의 니콜라스 오타멘디, 에콰도르의 모이세스 카이세도의 예선전 1경기 징계를 유예해 본선 개막전 출전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 사례들은 모두 예선전에서 나온 조치였다. 본선 무대, 그것도 토너먼트 당락이 걸린 상황에서 이 조항이 동원된 것은 가린샤 이후 최초다.
당장 다음 상대인 벨기에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벨기에축구협회는 성명을 내고 "FIFA가 든 27조는 이전에 발표된 징계 처분의 집행을 유예할 수 있다는 조항이지만, 같은 징계 규정 66조 4항은 레드카드 시 자동으로 다음 경기 출전정지가 뒤따른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이번 월드컵 경쟁 규정 10조 5항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모든 참가국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고 페어플레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루디 가르시아 벨기에 대표팀 감독도 기자회견에서 노골적으로 상황을 비꼬았다. 가르시아 감독은 "벨기에축구협회는 단순히 협회나 대표팀을 방어하는 게 아니라 축구 자체, 그 진실성과 윤리를 지키려는 것"이라며 "내 기억이 맞다면 월드컵 역사상 이런 결정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FIFA 사무실에서는 7월 5일이 4월 1일 만우절인 줄 알았는가 보다"라고 덧붙였다.
브라질을 꺾고 8강에 오른 노르웨이의 스톨레 솔바켄 감독도 거들었다. 솔바켄 감독은 인터뷰에서 "솔직히 말하면 FIFA의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며 "레드카드가 나왔고 비디오 판독(VAR)도 레드카드가 맞다고 판단해 퇴장시켰으면 1경기 출전정지를 받는 게 맞다"고 비판했다. 이어 "만약 발로건이 골을 넣거나 좋은 경기를 하면 벨기에는 격분할 것"이라며 "다음에 또 레드카드가 나오면 그때마다 위원회가 모여서 없던 일로 해줄 건가. 아주 나쁜 결정이고 벨기에가 안타까울 따름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심판 그레이엄 스콧은 형평성 문제를 짚었다. 조별리그에서 카타르의 아심 마디보가 캐나다의 이스마엘 코네의 다리를 부러뜨린 태클로 오히려 1경기였던 자동 출전정지가 5경기로 늘어난 전례를 언급하며 "마디보와 발로건의 태클은 둘 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상대에게 실제 부상 위험을 안겼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며 "결과가 아니라 행위로 판단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티에리 앙리, 게리 네빌, 이언 라이트 등 방송 해설을 맡은 전직 선수들도 일제히 결정이 너무 늦었으며 정말 형편없는 결정이라는 취지의 비판을 쏟아냈다.
FIFA를 다시 위대하게? 수치를 모르는 인판티노(사진=유튜브 화면 갈무리)
인판티노와 트럼프, 그 각별한 사이
이번 결정을 둘러싼 의혹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인판티노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긴밀한 유착 관계 때문이다. FIFA는 지난해 12월 급조한 '평화상'을 신설해 '노벨 평화상 호소인' 트럼프에게 수여했다. 인판티노 회장은 지난해 8월에는 백악관을 찾아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건네기도 했다. 인판티노는 과도한 친 트럼프 행보와 발언으로 "트럼프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축구협회는 이날 성명에서 "우리는 징계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며, 폴라린 발로건이 내일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시애틀에서 열릴 벨기에와의 16강전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뻔뻔하게 발표했다. 핵심 미드필더 크리스천 풀리식도 "당연히 우리에겐 힘이 되는 소식"이라며 "반칙 장면을 보면 고의성은 전혀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 더 심한 반칙도 많이 봤다"고 동료를 감쌌다. 발로건 본인은 취재진 앞에 서지 않은 채, 소셜미디어에 미국 팬들 앞에 선 사진과 함께 마이클 잭슨의 노래 '배드(Bad)'를 배경음악으로 올렸다.
발로건은 이번 대회 3골로 미국 팀 내 최다 득점자다. 미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 이후 24년 만의 8강 진출을 노리고 있고, 벨기에와의 16강전은 7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다. 미국 대통령이 전화 한 통으로 출전 정지를 해결하는데 다음에는 뭘 못할까 싶다. 이런 식이면 남은 미국 경기에선 심판 판정 하나하나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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