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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춘추
백인천 전 감독(사진=삼성)[더게이트]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전설의 4할 타자'이자 LG 트윈스 창단 시즌 우승 사령탑, 백인천 전 감독이 1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백인천의 야구 인생은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만 39세 나이로 타율 0.412를 기록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4할 타율의 전설을 쓴 타자였다. 1990년에는 LG 트윈스를 창단 첫해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 사령탑 시절에는 극심한 부진과 파행 운영으로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안았다.
한국전쟁 피란민에서 일본 리그 타격왕까지
백인천 전 감독(사진=삼성)
1942년 중국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난 백인천은 한국전쟁 때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라 경동중·경동고에서 방망이를 잡았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출신으로 하체가 탄탄했던 백인천은 1961년 실업야구 농협에 입단한 뒤 이듬해 자유계약으로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닛폰햄 파이터즈)에 진출했다.
이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 롯데 오리온즈(현 지바 롯데 마린스), 긴테쓰 버팔로스를 거치며 1981년까지 일본 무대를 누볐다. 다이헤이요 시절인 1975년에는 타율 0.319로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일본 시절 성적은 1969경기 1831안타에 209홈런, 212도루로 통산 200홈런-200도루를 동시에 달성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백인천은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고국 땅을 밟았다. 당시 한국 나이 41세로 원년 최고령 선수였던 백인천은 그해 타율 0.412(72경기 250타수 103안타)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백인천의 장타율 0.740은 2015년 NC 에릭 테임즈가 넘어서기 전까지 33년간 깨지지 않았고, 출루율 0.502 역시 2001년 롯데 펠릭스 호세가 경신하기 전까지 최고치였다.
1983년 사생활 문제로 MBC를 떠난 백인천은 삼미 슈퍼스타즈로 옮겨 타격코치 겸 선수로 뛰다 1984시즌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1985년 청보 핀토스 타격 인스트럭터를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 골프 사업을 하며 야인으로 세월을 보냈다.
LG 창단 우승, 그리고 삼성에서 발굴한 이승엽
백인천 전 감독(사진=삼성)
1990년 LG 트윈스의 초대 사령탑을 맡은 백인천은 창단 첫해 팀을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에 올려놓았다. 이듬해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으나, 199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삼성에서는 정상에 서지 못했지만 대대적인 타선 세대교체 성공으로 훗날 삼성 우승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승엽, 정경배, 최익성, 신동주 등 젊은 타자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다만 삼성에서 계약기간은 두 차례 뇌출혈로 쓰러진 탓에 온전히 마치지는 못했다.
건강을 회복한 백인천은 2002년 6월 최하위 롯데 자이언츠를 구할 마지막 승부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롯데에서 보낸 두 시즌 동안 성적은 163경기 41승 119패 3무, 승률 0.256에 그쳤다. 역대 롯데 감독 중 최악의 지표. 여기에 각종 논란과 구설수가 불거지며 결국 2003년 8월 5일 경질됐고, 이후 프로야구 현장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지도자 생활을 마친 백인천은 은퇴선수협의회 회장 등을 지내며 야구계 원로로 활동했다. 하지만 세 차례 찾아온 뇌졸중과 이혼, 지인에게 당한 사기, 불행한 가족사 등으로 외롭고 고단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에는 충남 천안에서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으며 병마와 싸웠다.
KBO는 고인의 장례를 KBO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빈소는 천안 단국대병원에 마련되며, 구체적인 일정은 미국에 머무는 동생이 귀국하는 대로 확정된다. 백인천의 타계로 프로야구 원년 사령탑 가운데 생존자는 85세 박영길 전 롯데 감독만 남게 됐다. 불꽃 같던 4할 타자의 시대가 비로소 완전한 전설 속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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