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원자폭탄·재일교포 설움 딛고 이룬 NPB 3000안타 대기록, '전설' 장훈 선생 별세...향년 86세
장훈과 이승엽(사진=삼성)장훈과 이승엽(사진=삼성)

[더게이트]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3000안타 대기록의 주인공, 재일동포 야구 원로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영원한 잠에 들었다. 향년 86세.

일본 TBS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장훈은 9일 오후 5시쯤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히로시마 출신인 그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 롯데 오리온스 등에서 뛰며 타격왕을 일곱 차례 차지했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개인 통산 3000안타 고지를 밟은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장훈은 1940년 6월 히로시마에서 경남 창녕 출신 아버지 장상정과 경남 합천 출신 어머니 박순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형과 함께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팔았고, 이듬해 가족을 히로시마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해방 후 고향 창녕을 찾았다가 갈치 가시가 목에 걸려 식도가 파열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일 국교가 끊긴 시절이라 장훈 가족은 장례조차 치르러 갈 수 없었다.

네 살 때는 산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으려다 후진하던 트럭을 피하지 못해 오른손이 불 속에 처박혔다. 정식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어머니가 치마저고리를 찢어 상처를 감싸줬다. 이 화상으로 엄지와 검지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하나로 눌어붙었다. 이듬해인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집 뒤편의 70m 남짓한 산이 화마를 막아준 덕에 가족 대부분은 목숨을 건졌지만, 근로봉사에 나섰던 열두 살 큰누나 박점자는 전신 화상을 입고 숨졌다. 장훈은 죽어가던 누나의 입술에 포도를 따서 적셔준 그날을 평생 잊지 못했다.

장훈은 원폭 피해자임을 20년 가까이 밝히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원폭 피해자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괴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따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에서야 그는 한 젊은이가 TV에서 "전쟁은 몰라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아, 원폭 피해자임을 스스로 공개하고 반전·반핵을 알리기 시작했다.

광각타법으로 완성한 3000안타생전의 장훈 선생(사진=삼성)생전의 장훈 선생(사진=삼성)

손가락 장애와 원폭 피해, 재일교포라는 신분까지 세 가지 모래주머니를 차고 야구를 시작한 장훈이었다. 소학교 시절 동네 친구가 일본 학생들에게 "조센징은 개만도 못하다"는 말과 함께 짐승 취급을 당하는 걸 목격한 뒤, 화가 난 장훈이 어머니에게 "조센징이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아들을 크게 야단쳤다. "조선이 인구가 적고 무기가 없어 나라를 빼앗겼을 뿐이다. 내일부터는 가슴을 쭉 펴고 살거라." 장훈은 이 말을 60년이 지나서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중학교 때는 축구부와의 다툼에서 상대가 "조센징 주제에"라고 소리치자 배트로 머리를 가격해 쓰러뜨렸고, 이 일로 명문 히로시마상고 입학이 좌절됐다. 이어 지원한 고료고 면접에서도 정직하게 사정을 밝혔다가 "우리 학교도 너 같은 녀석은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결국 히로시마 최고 불량학생들이 다니던 마쓰모토상고에 겨우 자리를 얻었다.

이후 오사카 나니와상고로 전학한 뒤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후배 폭행 사건의 주동자로 억울하게 몰려 대회 출전 정지 처분을 받자 장훈은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밤하늘의 달에 비친 어머니와 형의 얼굴을 보고서야 마음을 돌렸다. 그는 이 무렵을 회고하며 "지금도 스포츠에 민족 차별이 개입됐던 그 시절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오른손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장훈이 고안한 건 공을 끝까지 지켜보다 밀어치는 광각타법이었다. 도에이 타격코치 마쓰키 겐지로는 입단 직후 스윙을 10분만 보고도 "왼팔만 쓰고 있다"고 지적했고, 이후 장훈은 오른손 하나로 하루 600~700개씩 토스배팅을 하는 훈련을 거쳐 좌우 고르게 타구를 보내는 타법을 완성했다. 1959년 도에이 입단 이후 이 타법을 앞세워 타격왕만 일곱 차례 거머쥐었다.

정점은 1980년 5월 28일이었다. 롯데 오리온스 소속이던 장훈은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홈런으로 완성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 기록이었다. 이날 어머니 박순분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았다. 장훈은 데뷔 초 성적 부진으로 야유를 받던 시절, 한복 차림의 어머니가 "내가 한복을 입어 네가 더 야유받는 것 같다"며 눈물짓자 "어머니의 한복이 제겐 큰 힘이 됩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장훈의 통산 기록은 타율 0.319, 3085안타, 504홈런, 319도루다. 특히 최다안타 기록은 2009년 스즈키 이치로가 미·일 통산 기록으로 넘어서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깨지지 않았다.

은퇴 후 장훈은 해설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특유의 독설을 앞세운 화법으로 TBS '선데이 모닝' 등에 고정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2019년에는 특급 유망주 사사키 로키의 고교야구 결승전 결장 문제를 두고 "부상이 두려우면 야구를 그만두라"고 일갈해 당시 메이저리거 다르빗슈 유와 공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로 전에는 없던 비판자가 크게 증가하긴 했지만, 장훈을 비판하는 이들도 그의 야구 사랑과 열정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KBO리그 탄생의 숨은 주역장훈과 어머니 박순분 여사(사진=장훈 제공)장훈과 어머니 박순분 여사(사진=장훈 제공)

장훈은 한국 프로야구의 탄생에도 힘을 보탰다. 장훈은 일본 열도에 흩어져 있던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고국 무대에서 뛸 것을 권유했고, 1982년 KBO리그 출범 이전부터 이용일 전 KBO 총재 직무대행, 고 이호헌 전 KBO 사무차장과 함께 구단 수와 운영 체계를 조율하며 리그의 뼈대를 짰다. 일본 프로야구 현역 심판들을 데려와 한국 심판을 교육시켰고, 초대 총재 후보 인선에도 관여했다.

도에이 시절 한솥밥을 먹던 백인천을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에게 추천해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시킨 것도 그였다. 백인천은 훗날 귀국해 KBO리그 원년 4할 타자로 역사에 남았다. 지난달 백인천이 별세했을 때 장훈은 일본 매체 스포니치를 통해 "나보다 세 살 어린 소중한 후배이자 같은 시대를 함께 달려온 동료"라고 그를 추모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의 뒤를 따르게 됐다.

평생 여러 차례 귀화 제의를 뿌리치고 한국 국적을 지켜온 장훈은 지난 2024년 12월 산케이신문 인터뷰에서 "몇 년 전 국적을 바꿨다. 지금은 일본 국적"이라고 밝혀 야구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 "20년 넘게 KBO 총재 특별보좌역을 하면서 프로리그를 만들었는데 한국시리즈, 올스타전 같은 행사에 한 번도 초청된 적이 없다"며 "은혜도 의리도 잊어버린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올해 들어 한국 야구계는 유독 큰 별을 자주 떠나보냈다. 지난달 15일에는 KBO리그 원년 4할 타자 백인천 전 감독이 향년 83세로, 19일에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끈 어우홍 전 대표팀 감독이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KBO는 두 사람의 장례를 모두 KBO장으로 치렀다. 장훈의 공로와 역사적 의미를 고려하면, KBO는 장훈에게도 적절한 예우를 표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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