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65회 충북도민체전 음성서 개막…11개 시군 3일간 열전

스포츠춘추
1984년 방한 당시 장훈 선생의 모습(사진=두산)[더게이트]
한·일 야구계의 큰 별이 졌다.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3000안타 레전드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이 9일 도쿄의 모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
장훈에게 야구는 단순한 공놀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고, 차별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더게이트 기자는 지난 2012년 도쿄 현지에서 생전의 장훈 선생과 만나 장시간에 걸친 독점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아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였다.
당시 71세였던 장훈은 "일본에서 태어나 여기서만 71년을 살았지만, 한국말은 거의 다 알아듣고 반은 할 수 있다"며 또렷한 한국말로 기자를 맞았다. 그리고 어디에도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던 유년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 놓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구나"
장훈과 어머니 박순분 여사(사진=장훈 제공)장훈은 한국에서 잉태되어 일본에서 태어났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아버지가 1939년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형제와 함께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팔았고, 이듬해 경남 합천 출신 어머니 박순분과 형제들을 히로시마로 불러들였다.
많은 불행과 고난이 장훈 가족을 덮쳤다. 아버지는 창녕의 고향집에 다니러 갔다가 갈치 가시가 목에 걸려 식도가 파열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한·일 국교가 단절된 시기라 가족은 장례조차 치르러 갈 수 없었다. 장훈은 "어머니가 밀항이라도 해서 한국에 가려 했지만, 그즈음 시모노세키 바다에서 한국인들이 탄 배가 전복해 많은 사람이 죽는 걸 보고 단념하셨다"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의 묘소를 처음 찾은 건 1958년,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였다.
"조국이라곤 하지만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마중 나온 학생들이 아리랑과 도라지를 부르며 울고 있더라. 그런데 참 이상하지.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아, 여기가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때 처음으로 '내가 한국인이구나' 하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장훈의 말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장훈은 다섯 살이었다. 집 뒤에 있던 70m 남짓한 산이 원폭의 화마를 막아준 덕에 온 가족이 참사를 피했지만, 근로봉사에 동원됐던 열두 살 큰누나 박점자는 전신 화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형이 백방으로 뛰어 쓰러진 아이들 사이에서 누나를 찾았다. 늘 자랑스럽던 누이였는데, 내 앞에 있는 누이는 끔찍하게 타들어가 있었다. 누나는 '엄마, 아파. 엄마 아파'를 외치며 계속 목이 마르다고 했다. 내가 포도를 따서 입술을 적셔줬다." 치료라고 해봐야 어머니가 치마저고리를 찢어 물에 적셔 그을린 몸을 닦아주는 게 전부였다. 누나는 그렇게 숨을 거뒀다.
장훈은 20년 가까이 자신이 원폭 피해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원폭 피해자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괴소문이 돌아 따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65년, 한 젊은이가 TV에 나와 "전쟁은 잘 모른다.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아 스스로 원폭 피해자임을 공개했다. 이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전·반핵의 중요성을 알렸다.
"조센징이 그렇게 나쁜 겁니까"
장훈 선생의 선수 시절 모습.장훈이 오른손을 크게 다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네 살 때 산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으려다 후진하던 트럭을 피하지 못해 오른손이 불 속에 처박혔다. "병원에 갔지만 정식 치료는 받지 못했다. 좋은 간호사분이 붕대와 약을 주셨는데, 그마저 떨어지면 어머니가 치마저고리를 찢어 화상 입은 손을 감싸주셨다"고 그는 말했다. 이 사고로 엄지와 검지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하나로 눌어붙었다.
장애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차별이었다. 소학교 시절, 동네 친구가 일본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개처럼 네발로 걷도록 강요당하며 "조센징은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는 걸 목격했다. 화가 난 장훈이 그 자리에서 상대 학생들을 모두 쓰러뜨렸지만, 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다.
"어머니, 조센징이 그렇게 나쁜 겁니까. 그렇게 조센징이 나쁜 거면 저는 조센징이 되지 않을 거예요!" 어린 장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어머니는 태어나 처음으로 크게 화를 냈다.
"조센징이 뭐가 나쁘고 하등한 존재란 말이냐. 조선이 인구가 적고 무기가 없어 나라를 빼앗겼을 뿐이다. 일본과 같은 조건이었으면 조선도 일본 같은 나라가, 아니 더 큰 나라가 됐을 것이다. 훈아, 내일부터는 가슴을 쭉 펴고 살거라.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다 같은 사람이다. 네가 당당하면 일본 사람들도 '조선인이 원래 저렇게 당당하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장훈은 60년이 지난 뒤에도 이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니 가슴에 쌓였던 뭔가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때 다짐했다. 개처럼 네발로 기면서 사느니, 당당히 두 발로 걷다가 죽겠다고."
고시엔의 좌절, 그리고 죽음의 문턱
생전의 장훈 선생중학교 시절 장훈은 야구와 싸움 모두로 이름을 날렸다. 상대가 '조센징'이라며 놀리거나 가족을 들먹일 때만 주먹을 썼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험악한 평판 탓에 명문 히로시마상고 입학을 거절당했고, 이어 지원한 고료고에서도 사정을 정직하게 밝혔다가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결국 히로시마 최고 불량학생들이 모이던 마쓰모토상고에 겨우 자리를 얻었다.
전환점은 오사카 나니와상고 전학이었다. 학비를 대준 형 장세열의 희생과 야구부장 나카지마 하루오의 도움으로 입학한 이곳에서, 3학년 장훈은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을 고시엔대회 본선 진출 직전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후배 폭행 사건의 주동자로 억울하게 몰려 대외경기 출전 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모든 게 무너졌다.
"그때 정말 죽으려고 결심했었다. 고시엔대회에서 내 가치를 선보여 명문팀에 입단해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게 내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다케우치 감독을 처단하고, 나는 전철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려 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찰나, 밤하늘의 달에 비친 어머니와 형의 얼굴이 그를 붙잡았다. "내가 혼자 죽어도 어머니와 형은 슬퍼할 게 틀림없었다. 무엇이 가족을 위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장훈은 분노를 내려놨지만, 누명을 씌운 감독을 향한 감정까지 내려놓지는 못했다고 했다. "지금도 스포츠에 민족 차별이 개입됐던 그 시절을 용서할 수가 없다."
광각타법과 어머니의 치마저고리
1984년 방한 당시 장훈 선생과 김성근 감독(사진=두산)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한 열아홉 살 장훈은 타격코치 마쓰키 겐지로를 만나면서 야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마쓰키는 장훈의 스윙을 10분 지켜본 뒤 "왼팔만 쓰고 있다"고 정확히 지적했다. 장훈은 오른손 하나만으로 하루 600~700개씩 토스배팅을 하는 훈련을 거듭했고, 이를 통해 좌우 필드로 고르게 타구를 보내는 이른바 광각타법을 완성했다.
1980년 5월 28일, 롯데 오리온스 소속이던 장훈은 가와사키 구장에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홈런으로 완성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 기록이었다. 이날도 어머니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았다. 장훈은 데뷔 초 성적 부진으로 야유를 받던 시절, 한복 차림의 어머니가 "내가 한복을 입어 네가 더 야유받는 것 같다"며 눈물짓자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한복이 제겐 큰 힘이 됩니다."
인터뷰 말미, 장훈은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1985년 여든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훈은 "19살에 프로에 입문해 4년 정도는 선수로 틀을 잡는 시기였다. 정작 제대로 효도한 건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내 마지막 꿈은 별 게 아니다. 다시 타석에 서는 것도, 4000안타를 치는 것도 아니다. 내 마지막 꿈은 다시 어머니 앞에서 '엄마' 하고 한 번 불러보는 거다. 울 엄마, 참 보고 싶다." 그렇게도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장훈이 이제 어머니의 곁으로 향하게 됐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관심 없음
{카테고리}에 관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