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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춘추
안현민(사진=KT)[더게이트=수원]
흔히 가을야구에서는 '경험'이 제일 중요하다고들 한다.
가을야구는 정규시즌과는 관중의 함성부터 다르다. 상대는 리그에서 가장 강한 팀,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다. 실수 하나가 승패를 가르고, 때로는 시리즈 전체의 운명까지 바꾼다. 그래서 큰 경기를 많이 치러본 선수가 유리하다. 야구계의 오랜 통념이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첫 경기에 나선 KT 위즈 선수들은 이런 다수설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치 가을야구가 처음이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고 플레이를 통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KT는 3일 수원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2026 신한 SOL KBO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8대 7로 꺾었다. 8대 0으로 앞서다 1점 차까지 쫓기며 진땀을 빼긴 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승리는 승리다.
선발 데이비스 대니엘은 생애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승리투수가 됐다. 샘 힐리어드는 생애 첫 가을야구 경기에서 공격과 수비, 주루에서 모두 활약하며 데일리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다. 지난해 신인왕 안현민은 생애 첫 가을야구 두 번째 타석에서 자신의 포스트시즌 1호 홈런을 터뜨렸다. 앞으로 10개, 20개씩 쳐낼 전설의 시작이다.
이날 전까지 세 선수의 포스트시즌 출전 경기수는 모두 더하면 '0'이었다.
가을야구 처음인 투수 가을야구 처음인 중견수가 구했다
KT 응원단(사진=KT)선발 대니엘은 올 시즌 중반 대체 외국인 투수로 KT에 합류했다. 정규시즌 막판 호투를 거듭하며 사실상 에이스 역할을 수행했고, 이강철 감독은 2021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인 고영표와 소형준을 제치고 대니엘에게 1차전 선발을 맡겼다.
대니엘에겐 한국시리즈만 처음이 아니다. 대니엘은 미국에서도 가을야구 마운드에 올라본 적이 없다. 메이저리그만이 아니라 마이너리그에서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시리즈 준비 기간에 만난 대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기대된다. 경기장 분위기와 팬들의 응원도 기대하고 있다. 선수 생활을 돌아보면 경쟁이 치열한 상황일수록 집중력을 잘 끌어올렸던 것 같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충분히 긴장할 법도 했다.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1회초 삼성 선두타자 김지찬이 내야안타로 출루했다. 후속타자 박승규가 받아친 공은 중견수 머리 위로 뻗어갔다. 장타가 될 수 있는 타구였다.
여기서 중견수 힐리어드가 나섰다. 역시 가을야구가 태어나 처음인 선수다.
힐리어드는 첫걸음에서 잠깐 주춤했다. 그러나 곧바로 빠른 발로 뒤를 향해 달렸고, 오른팔을 쭉 뻗었다. 공은 담장 앞에서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첫 가을야구에 긴장했을 -긴장이란 걸 할 줄 안다면 말이지만- 대니엘이 한숨을 돌리기에는 충분한 장면이었다.
"대니엘이 모자를 벗어 보이며 좋은 수비였다고 인사했다. 나도 손을 흔들어 답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힐리어드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경기 두 번째 타자였지만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공을 놓쳤다면 1루 주자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홈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순식간에 0대 1로 뒤질 수도 있었다."
힐리어드는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로 달려가면서 손을 뻗었고 다행히 공을 잡았다. 우리 투수를 도울 수 있어서 기뻤다"고 덧붙였다.
마치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온 사람 같은, 일상적인 일 하나를 처리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후 대니엘의 피칭은 탄탄대로였다.
구자욱을 삼진으로 잡는 사이 2루로 뛰던 김지찬까지 아웃되면서 1회가 끝났다. 2회 2사 후 김영웅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실점하지 않았다. 3회부터 6회까지는 주자를 한 명도 내보내지 않았다.
미국의 제이콥 미저라우스키처럼 무시무시한 광속구를 던진 것도 아니다. 대니엘의 이날 최고 구속은 148km/h. 대부분의 공이 140km/h 중반에 형성됐다.
그런데 삼성 타자들은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공을 끝까지 숨겨뒀다 빠른 팔 스윙으로 던지는 투구폼이 디셉션 효과를 냈다. 무브먼트가 워낙 좋아 140km/h 중반의 공이 타석에서는 150km/h대 강속구처럼 느껴졌다.
좌타자에게는 포심과 체인지업을, 우타자에게는 투심과 스위퍼를 던졌다. 초구나 2구부터 과감하게 스트라이크를 꽂았고, 초구가 볼이면 2구는 반드시 스트라이크였다. 대부분의 타자와 4~5구 안에 승부를 끝냈다.
삼성에는 낯선 상대이기도 했다. 시즌 도중 합류한 대니엘은 정규시즌 삼성전에 한 번도 등판하지 않았다. 이강철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즌 막판 삼성전에 대니엘을 쓰지 않고 숨겨뒀다.
만약 대구 홈구장에서 하루라도 훈련할 시간이 있었다면, 트라젝트 아크 머신으로 대니엘의 공을 미리 간접 경험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5차전까지 치렀다. 삼성 관계자는 "5차전이 끝나고 당일 바로 이동해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영상으로 보면서 분석하긴 했지만, 실제 타석에서 상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삼성 타선은 세 바퀴째 타순이 회전한 7회 들어서야 대니엘을 공략했다. 박승규의 안타에 이어 구자욱이 2점 홈런을 쳤고, 르윈 디아즈의 안타가 나오자 대니엘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최종 성적은 6이닝 5피안타 7탈삼진 3실점. 볼넷은 하나도 없었다.
0볼 2스트라이크, 하필 가장 싫어하던 하이볼을 공략
데이비스 대니엘(사진=KT)대니엘이 마운드를 지키는 동안, 타선에서는 또 다른 '가을 초보'들이 일을 냈다.
1회말 선두타자 최원준이 안타로 출루했다. 안현민은 생애 첫 포스트시즌 타석에서 볼넷을 골라 1사 1, 3루를 만들었다. 다음 타자는 4번 힐리어드. 메이저리그에서 한번도 포스트시즌을 경험하지 못한, 콜로라도 로키스라는 최악의 팀에서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힐리어드의 첫 가을야구 타석이었다.
볼카운트는 순식간에 0볼 2스트라이크가 됐다.
삼성 선발 최원태의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존 가운데 높은 쪽으로 들어오는 속구였다. 힐리어드를 시즌 내내 괴롭힌 바로 그 코스다.
시즌 초반의 힐리어드는 높은 공에 애를 먹었다. KBO리그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해 장기 슬럼프를 겪었고 퇴출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높은 스트라이크를 그냥 지켜보다 삼진을 당하거나, 방망이를 휘둘러도 제대로 맞히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11월의 힐리어드는 달랐다.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맞은 공이 수원 구장 좌중간을 둘로 갈랐다. 주자 두 명이 모두 홈을 밟았다. 첫 포스트시즌 타석에서 나온 선취 2타점 2루타였고, 이 한 방은 결승타가 됐다.
"높은 공은 원래 내게 공략하기 어려운 코스였다. 시즌 내내 스윙과 타격 접근법을 계속 다듬었다. 지금은 스윙 감각이 아주 좋고 높은 공도 편안하게 받아칠 수 있다."
힐리어드는 2스트라이크 이후의 대응을 특히 강조했다.
"투수들은 2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높은 공을 던지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공이 들어올 때 언제든 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높은 공에 방망이를 제대로 갖다 댔고 좋은 결과가 나왔다."
힐리어드는 8회에도 바깥쪽 높은 공을 때려 중전 안타로 연결했다. 이날 성적은 4타수 3안타 1볼넷 2타점 2득점. 데일리 MVP와 '오늘의 타격감' 상이 모두 힐리어드에게 돌아갔다.
걱정이 태산이던 안현민, 두 번째 타석에서 걱정을 지웠다
안현민(사진=KT)3회말에는 안현민 차례였다.
선두타자 김민혁이 2루타를 치고 나간 무사 2루. 볼카운트 1볼에서 최원태의 체인지업이 가운데로 조금 높게 들어왔다.
안현민은 놓치지 않았다.
타구는 레이저처럼 낮고 빠르게 왼쪽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맞는 순간 KT의 1루 쪽 응원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형형색색의 비트배트가 거대한 물결처럼 출렁였다. 비거리 105m의 2점 홈런. 2022년 프로에 입단한 안현민이 5년 만에 밟은 포스트시즌 무대의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이 나왔다.
사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근심이 많았던 안현민이다. 시즌 막판 가라앉은 타격감이 기대만큼 올라오지 않아서다. 시리즈 준비 기간에 만났을 때도 평소답지 않게 웃음기 쏙 뺀 얼굴로 복잡한 심경을 이야기했던 그다.
그 걱정이 홈런 한 방으로 날아갔다.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결과였다. 사실 타격감 자체보다 걱정을 떨쳐내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걱정을 떨쳐내려면 결국 경기에서 결과가 나와야 했다. 다행히 첫 경기부터 홈런이 나왔다. 빠르게 결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기자회견 내내 안현민은 싱글벙글 웃었다. 두어번 농담으로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시리즈 전의 심각한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 우리가 알던 안현민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홈런 하나로 만족할 안현민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굉장히 중요한 점수였던 것 같아서 좋다. 그런데 경기를 하다 보니 잘했던 장면보다는 아쉬웠던 타석이 더 많이 생각난다. 내일은 그런 타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
사실 가을야구가 처음이다 뿐이지, 큰 경기 자체가 처음인 선수는 아니다. 안현민은 지난해 11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K-베이스볼시리즈 한일전에 4번타자로 나섰고, 올해 3월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했다.
지난해 한일전을 마친 뒤 소감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재미있었다"였다.
그럼 한국시리즈는?
"오늘은 수비를 나가지 않아서 떨릴 만한 상황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재미있었다."
안현민은 옆자리에 앉은 마무리 박영현을 가리켰다.
"사실 오늘 가장 떨렸던 순간은 영현이가 (8회) 폭투를 던졌을 때였다. 왜 그렇게 떨렸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이 오늘 경기에서 유일하게 긴장됐던 순간이었다."
박영현의 8회초 폭투는 삼성의 8대 7 추격으로 이어졌다. 팀 전체가 가슴을 쓸어내렸을 그 장면을, 안현민은 농담으로 소화했다. 회견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6대 0, 2사, 평범한 땅볼…그래도 힐리어드는 뛰었다
샘 힐리어드(사진=KT)가을야구가 처음인 선수에게 필요한 자신감과 즐기는 자세를 안현민이 보여줬다면, 힐리어드는 '절실함'을 보여줬다.
6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 KT가 6대 0으로 크게 앞선 상황이었다. KT 응원석은 승리를 확신한 축제 분위기였고, 삼성 응원석의 응원가 소리는 조금씩 작아지는 중이었다.
힐리어드가 친 땅볼 타구가 1루 쪽으로 향했다. 공이 높이 튀어 오르자 1루수 르윈 디아즈가 타구를 처리하려고 베이스에서 떨어졌다. 힐리어드는 주저 없이 전력질주했다.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투수와 뱅뱅 상황이 벌어졌다. 최초 판정은 아웃이었다. 힐리어드가 비디오 판독을 원했고, KT 벤치가 신청했다.
비디오 판독 결과 힐리어드의 발이 간발의 차로 빨랐다. 판정은 세이프로 뒤집혔다.
6대 0큰 점수차에 2아웃. 평범한 땅볼. 그래도 힐리어드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고, 비디오 판독까지 신청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후속타자 김현수가 우측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3아웃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공격은 8대 0이 됐다.
나중에 삼성이 7회 5점, 8회 2점을 뽑아 8대 7까지 따라온 걸 생각하면, 힐리어드의 전력질주가 KT의 승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힐리어드는 당시 장면을 자세히 기억했다.
"공이 높이 튀었고, 1루수가 베이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투수와 내가 1루에서 승부하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투수가 먼저 베이스에 도착했지만 공이 글러브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베이스를 밟았다."
이어 힐리어드는 "내 장점 가운데 하나는 빠른 발이다. 이런 큰 경기에서는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어떤 타구를 치더라도 끝까지 전력질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상 그 홈런이 승리를 결정한 홈런이었다. 큰 경기일수록 작은 플레이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힐리어드가 야구를 대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한 마디다.
"경기장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경기를 마무리한 박영현(사진=KT)한번도 가을야구를 해본 적 없는 힐리어드에게 수원에서 열리는 한국시리즈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분명히 다른 분위기였다. 모든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들떠 있었다. 한국시리즈는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 무대다. 경기장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팬들은 경기 내내 큰 소리로 응원했고, 상대 팀도 그 열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경기하는 게 정말 즐거웠다."
큰 경기는 '경험'이라는 이론에 따르면, 가을야구가 처음인 선수들은 긴장하고 압박을 느끼고 자기 야구를 못 해야 한다.
KT 선수들은 그러지 않았다. 대니엘은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6이닝을 책임졌다. 안현민은 홈런을 날렸다. 힐리어드는 결승 적시타를 치고 외야에서 날아오르고 전력질주로 팀을 구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겠다는 열망이 KT 선수들을 움직인다. 가을야구의 부담감과 압박을 이겨내는 힘이다.
"당연히 우승하고 싶다. 그래서 야구를 하는 것이다. 지난 1월 호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우리는 우승을 이야기했다. 그때부터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가을야구 경험 '0'에서 이제 '1'이 된 힐리어드의 말이다.
"이제 우리가 정말 한국시리즈에 올라와 첫 경기를 이겼다. 선수들이 모두 들떠 있고 나도 무척 기쁘다. 끝까지 해낸다면 우리 모두에게 정말 대단한 성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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