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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수능' 배현성, 모범생의 두 얼굴

스포츠춘추
크리스 페덱(사진=삼성)[더게이트=수원]
"이런 야구는 처음 해봤다."
수많은 가을야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강철 KT 위즈 감독이 혀를 내둘렀다. 이긴 쪽도 다르지 않았다. 삼성 라이온즈 박진만 감독은 "너무 힘든 경기였다"는 말부터 꺼냈고, 무승부만 세 번에 9차전까지 치렀던 2004년 한국시리즈를 떠올렸다. 선수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여러 차례 경험했고 MVP까지 받아본 두 감독에게도 4일 밤 수원에서 벌어진 승부는 혼이 쏙 빠지는 경기였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하지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법한 4시간 21분 '늪 야구'가 펼쳐졌다.
삼성은 이날 수원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2026 신한 SOL KBO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KT를 연장 12회 혈투 끝에 3대 2로 꺾었다. 전날 1차전에서 난타전 끝에 7대 8, 한 점 차로 졌던 삼성은 천신만고 끝에 반격에 성공하며 시리즈 전적 1승 1패로 균형을 맞췄다.
경기 내용은 그야말로 어질어질했다. 연장전에서 리드를 잡는 적시타를 친 선수가 바로 다음 수비에서 평범한 땅볼을 놓쳐 승리를 날렸고, 곧바로 끝내기 안타가 될 수도 있었던 타구는 방금 실책을 저지른 그 선수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다. 12회에는 병살로 끝날 뻔한 공격이 비디오 판독 끝에 이어지더니 수비 실책으로 결승점이 나왔다.
두 팀이 12이닝 동안 때린 안타는 무려 25개. 볼넷 7개까지 더하면 32차례나 출루했는데, 점수는 합쳐서 5점에 불과했다. 삼성은 14안타에 볼넷 4개를 얻고도 3점에 머물렀고, KT는 11안타에 볼넷 3개를 얻고도 2점에 그쳤다. 연장 10회 동점은 실책에 이은 밀어내기 볼넷으로 나왔고, 12회 결승점은 악송구로 얻은 점수였다. 해본 사람도 이런 야구는 처음이겠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런 야구는 처음 봤다.
25안타에 단 5득점…찬스마다 찬물 끼얹은 타자들
디아즈(사진=삼성)처음부터 이렇게 어지러운 경기는 아니었다. 이날 양 팀 선발투수는 나란히 7이닝 1실점으로 팽팽한 투수전을 벌였다. 삼성 크리스 페덱은 10일 동안 세 번째 선발 등판하는 강행군에도 102구를 던지며 7이닝 8피안타 1볼넷 3탈삼진 1실점으로 버텼다. '사자 킬러' KT 고영표도 96구로 7이닝 7피안타 무사사구 4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다.
다만 두 선발의 호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타자들이 날린 기회가 너무 많았다. 삼성은 2회초 최형우의 2루타에 이은 르윈 디아즈의 적시 3루타로 선취점을 뽑은 뒤 계속된 무사 3루에서 추가점을 노렸지만, 디아즈가 홈으로 뛰어들다 아웃됐다. KT도 1회와 3회 선두타자 최원준의 출루로 잡은 찬스를 날리고 4회에야 간신히 1대 1 동점을 만들었다.
6회에는 두 팀 모두 결정적인 기회를 날렸다. 삼성은 구자욱과 최형우, 디아즈가 3연속 안타를 때렸지만 점수를 내지 못했다. 햄스트링 부상을 안고 뛰는 중인 구자욱이 디아즈의 단타에 3루에서 멈췄고, 만루에서 류지혁이 병살타를 치면서 무득점으로 이닝이 끝났다. KT 역시 6회말 1사 2, 3루에서 후속타 불발로 리드를 잡을 기회를 놓쳤다.
선발투수들이 내려간 8회부터는 불펜 싸움이 전개됐다. 이강철 감독은 8회초 1사 1루, 볼카운트 1-0에서 마무리 박영현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틀 연속 마무리에게 아웃카운트 5개를 맡기는 승부수. 삼성도 좌완 필승 카드 이승민을 올려 맞섰고, 9회말 1사 2루에서는 국내 에이스 원태인까지 마운드에 세웠다.
이강철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박영현을 안 쓰고 지는 게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며 "맞더라도 영현이가 맞으면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내일 쉬니까 승부를 걸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박영현은 1.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삼성도 이승민과 원태인이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서 1대 1 동점으로 정규이닝을 마쳤다.
적시타 친 디아즈, 바로 다음 이닝 실책…경기 후 박진만 감독에게 90도 인사
디아즈(사진=삼성)길었던 균형은 연장 10회초 삼성 공격에서 깨졌다. 김지찬의 몸에 맞는 공과 김성윤의 희생번트, 구자욱의 고의4구로 잡은 1사 1, 2루 기회. 박승규의 안타성 타구가 KT 중견수 힐리어드의 다이빙 캐치에 잡혀 2아웃이 됐지만, 후속 타자 디아즈가 KT 좌완 전용주를 상대로 우전 적시타를 터뜨려 찬스를 살렸다.
2대 1로 다시 삼성의 리드.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면 이날 결승타는 물론 MVP도 디아즈의 몫이었다. 그러나 10회말 수비에서 대형 실수가 나왔다. 1사 1, 2루에서 힐리어드의 1루 쪽 평범한 땅볼을 디아즈가 놓치면서 주자를 모두 살려준 것이다. 1사 만루에서 원태인이 김현수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해 경기는 다시 2대 2 동점이 됐다.
계속된 KT의 끝내기 찬스. 1사 만루에서 오윤석이 날카로운 직선타를 날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타구가 조금 전 실책을 저지른 디아즈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허경민마저 2루수 땅볼로 물러나면서 동점인 상태로 이닝이 끝났다. KT가 눈앞까지 다가왔던 승리를 날리는 순간이었다.
연장 12회초에는 KT 수비가 무너졌다. 삼성은 선두타자 박승규의 안타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어 디아즈의 2루수 땅볼 때 비디오 판독 끝에 병살타 판정이 뒤집혔고, 김상준의 우전 안타로 1사 1, 2루 기회를 이어갔다. 여기서 KT는 베테랑 우규민을 마운드에 올렸다.
이재현의 땅볼 타구가 투수 정면으로 향했다. 우규민은 공을 잡아 2루로 던졌고, 1루 주자 김상준이 아웃됐다. 2루수가 1루로 송구하면 병살로 이닝이 끝나는 상황. 그러나 KT 2루수 오윤석이 공을 한 번에 빼내지 못했고, 1루 송구마저 빗나갔다. 그사이 2루 주자 디아즈가 3루를 돌아 홈까지 파고들었다.
3대 2 리드를 잡은 삼성은 12회말 좌완 배찬승을 올려 경기를 끝냈다. 배찬승은 아웃카운트 2개를 잡은 뒤 힐리어드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베테랑 김현수를 2루수 땅볼로 처리하며 한 점 차 승리를 지켜냈다. 4시간 넘게 끝날 듯 좀처럼 끝나지 않던 긴 승부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먹으라고 준 걸 먹지 못했다"…이긴 감독도 진 감독도 한숨
원태인(사진=삼성)이강철 감독은 경기 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아쉬웠던 장면은 연장 10회말 오윤석의 직선타였다. 이 감독은 "오윤석의 1루수 직선타가 가장 아쉬웠다. 먹으라고 준 걸 먹지 못했다"며 "잘 쳤는데 타구가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한숨을 삼켰다.
승장 박진만 감독은 승리의 기쁨보다 힘겨웠던 경기 내용부터 이야기했다. 박 감독은 "너무 힘든 경기였다. 수많은 찬스를 살리지 못하면서 답답한 경기를 펼쳤다"고 돌아봤다. 경기가 연장 15회까지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박 감독은 "그래도 선수들이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줬다"며 "목표로 세운 1승 1패를 이루고 대구로 돌아간다"고 반색했다.
두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 온갖 경기와 별의별 상황을 다 겪어본 사람들이다. 이강철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의 핵심 투수로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다.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승 1세이브, 평균자책 0.56을 기록하며 MVP에 올랐다. 박진만 감독도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에서 여섯 차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2006년에는 삼성의 우승을 이끌며 MVP로 선정됐다.
그런 감독들에게도 이날 경기는 낯선 경험이었다. 이강철 감독은 "우리뿐만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이런 경기를 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이런 야구는 처음 해보는 것 같다"고 길게 탄식했다.
박진만 감독은 22년 전 현역 시절 한국시리즈의 기억까지 소환했다. 연장전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시리즈에서 무승부만 세 번 해봤다"며 2004년을 떠올린 박 감독은 "연장전에 돌입할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시 박 감독의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는 공교롭게도 지금 자신이 이끄는 팀 삼성과 무려 9차전까지 가는 난전을 치렀다. 원래는 7전 4선승제인 한국시리즈가 9차전까지 이어진 이유는 세 차례 무승부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경기 시작 후 4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2차전은 8대 8, 4차전은 0대 0, 7차전은 6대 6 무승부로 끝났다. 특히 4차전에서는 삼성 선발 배영수가 10이닝 동안 노히트를 기록하고도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이어졌지만 끝내 0대 0으로 마무리됐다.
11월 1일 열린 9차전은 역사에 남을 수중전이었다. 경기 내내 비가 쏟아졌고 운동장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현대는 엉망이 된 그라운드에서 삼성의 추격을 8대 7로 따돌리고 시리즈 전적 4승 3무 2패로 우승했다.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제패. 당시 2회초 동점 적시타로 삼성을 꺾는 데 힘을 보탰던 박진만은 이번에는 삼성 감독으로 KT를 이겼다.
박 감독은 경기 후 "디아즈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더라"고 전했다. 디아즈는 이날 6타수 4안타 2타점 1득점으로 삼성 공격을 이끌었지만 10회말 실책으로 영웅에서 '범인'이 될 뻔했다. 박 감독은 "어려운 타구는 잘 잡는데 쉬운 타구에서 실책이 나온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실책에 관한 질문이 다시 나오자 "오늘 이겼으니까, 이기면 다 지나간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질리게 만든 경기는 그렇게 삼성의 승리로 끝났다. 삼성과 KT는 5일 하루 쉰 뒤 6일 오후 6시 30분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한국시리즈 3차전을 치른다. 삼성은 아리엘 후라도, KT는 소형준을 선발투수로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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