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가 가르친 건 '수익률' 아닌 '도덕'…교사는 시장 논리 막아낼 최후의 방파제” [박구용 칼럼]
교실에서 이뤄지는 '학교 경제-금융교육'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 철학자'로 불리는 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는 “수익률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것이 공교육의 참된 본질”이라며 “교사를 교육 매개자로 존중할 때 공교육의 공공성 회복 가능하다”고 말한다(사진=현대, 더게이트)교실에서 이뤄지는 '학교 경제-금융교육'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 철학자'로 불리는 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는 “수익률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것이 공교육의 참된 본질”이라며 “교사를 교육 매개자로 존중할 때 공교육의 공공성 회복 가능하다”고 말한다(사진=현대, 더게이트)

[더게이트]

이재명 대통령은 4월 28일 국무회의에서 ‘학교 경제 금융교육은 교사 연수를 거치는 길보다 금융 전문가가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자리에서 대통령은 소풍과 수학여행이 사라진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구더기 무서워 장독을 없애면 안 된다”고도 했다. 두 발언 모두 교사와 교실에 닿아 있다.

한쪽에선 교사를 책임의 짐에서 풀어주려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교사를 우회하라고 말한 셈이다. 이 이중 메시지가 교실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이 순간 노무현 정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시절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송금, 이라크 파병, 대연정, 한미 FTA에 관한 입장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물론 내가 ‘가혹’이라 부른 그 결을 대부분의 사람은 알아채지 못했다.

나의 글은 언제나 알아듣기 어려운 은유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글쓰기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철학적 태도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의 속뜻이 곧장 가닿지 않는 일에 대한 불편함도 두려움도, 심지어 부끄러움도 없다. 나는 다만 나의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읽고, 자기만의 글쓰기 작업을 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글이 되는 자리, 그 자리가 나의 자리다.

노무현 시대의 글쓰기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칼럼을 안 쓴 지가 꽤 오래되었다. 예전에 나는 ‘비판적 지지’의 자리에서 글을 썼다. 노무현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나는 언제나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나의 철학적 태도를 바꾸었다. 정치와 무관한 척하는 철학적 글쓰기야말로 권력에서 가장 멀어지는 방식으로 권력의 논리에 종속되는 글쓰기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의 자리를 분명히 밝힌다.

이 글은 비판이지만 ‘비판적 지지’가 아니라 당파적 지지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다. 더 쉽게 말하자. 나는 이 글이 담은 이야기를 이재명 정부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이 글이 이재명 정부의 책임 있는 사람, 그 누구의 귀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나는 어떤 경우든 이재명 정부를 지지할 것이다. 이런 태도를 굳이 밝혀야 하는 것이 이 나라 민주주의의 슬픈 풍경이지만 어쩔 수 없다.

슬프지만 내가 이 태도를 견지하는 이유는 간단하지 않다. 동학 농민군, 독립군, 시민군의 뜻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어느 고등학생이 쓰는 글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이재명 정부가 ‘12·3 내란을 시민의 힘으로 이겨내고 만들어낸 정부’라는 사실, 그리고 대통령이 교육의 공공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지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교육 현장에 거의 즉각적으로 닿고, 한번 잘못 잡힌 방향은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KB스타 경제교실에서 KB금융공익재단 전문강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제교육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KB증권)KB스타 경제교실에서 KB금융공익재단 전문강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제교육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KB증권)

지시가 알려진 직후 교사들의 단체방이 복잡한 감정으로 시끄러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접한 한 교사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교사가 모든 것에 정답이라는 건 아니지만, 외부 강사 부르면 다 해결된다는 인식도 문제다.”

또 다른 교사의 지적은 더 가까운 현실의 소리다. 금융 전문가를 학교에 모시는 일은 ‘직업인 특강 두 시간’을 잡는 것조차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한다. 양질의 강사는 학교가 지급할 수 있는 강사료에 오지 않고, 부산처럼 국제금융센터가 있는 도시조차 사정이 빠듯한데 지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외부 전문가를 불러봐도 “학생들 눈높이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건 한 번 강의해 보면 바로 안다”는 증언도 이어진다.

가장 무거운 말은 따로 있었다. “이러다가 그 내란을 이기고 교사의 란으로 질 수도 있겠다.” 냉소의 외피를 두른 이 말 안에는 정치권이 자주 잊는 사실이 들어 있다. 학생 520만, 교사 50만, 학부모 800만–1,000만. 인구의 5분의 1이 교육 당사자이고, 교사이면서 동시에 학부모인 사람도 적지 않다. 교육은 자신의 경험으로 환원시켜 말할 수 있는 주제가 될 수 없다.

<교육과정을 들여다보면>

2022년 부산 송수초등학교 5학년 한 학급에서 진행된 '삼다수국(삼삼오오 모인 다양한 개성의 수다쟁이들)' 수업 진행 장면. 교실은 하나의 작은 국가의 기능을 했다. 학생들은 취직도 하고, 월급도 받고, 세금도 내고, 주식투자도 하면서 경제가 무엇인지 체감했다(사진=교육부)2022년 부산 송수초등학교 5학년 한 학급에서 진행된 '삼다수국(삼삼오오 모인 다양한 개성의 수다쟁이들)' 수업 진행 장면. 교실은 하나의 작은 국가의 기능을 했다. 학생들은 취직도 하고, 월급도 받고, 세금도 내고, 주식투자도 하면서 경제가 무엇인지 체감했다(사진=교육부)

현재 한국의 학교 금융·경제교육 체계를 차근히 보면 그림이 분명해진다. 초등학교에서는 사회과 안에 ‘용돈, 저축’ 같은 기초 개념이 포함돼 있지만, 별도 과목은 아니며, 교사 재량에 따라 거의 사라지기도 한다.

중학교에선 사회과에 ‘시장 경제, 금융과 경제 생활’ 단원이 들어가 은행·이자·신용을 다루지만, 여전히 이론 중심이고, 실제 금융 생활은 거의 다루지 못한다. 고등학교에선 ‘경제’가 선택 과목으로 가장 체계적으로 존재하나, 선택 과목이라 모든 학생이 배우지 않으며, 입시 중심 운영 탓에 실생활 금융과 가장 멀다.

별도로 금융감독원이 표준안과 학교 지원 정책을 운영하지만, 정규 교과가 아니라 특강·체험·외부 프로그램 수준에서 단발성으로 끝난다.

교육과정도 있고, 내용도 있고, 정책도 있다. 그러나 지속 구조가 없고, 발달 단계별 연계가 없고, 생활 적용 구조가 없다. 문제는 ‘교사가 못해서’가 아니라 ‘교육과정이 촘촘하지 않아서’이다.

그 공백을 메우려고 관련 교과 교사들이 비교과 활동을 자발적으로 운영해 왔고, 학생들도 주도적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왔다. 일반고 지리 교사가 부동산 동아리를 맡아 운영하는 사례가 그렇다. 정작 일부 자사고는 그런 활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증언도 있다.

<어디서 어긋났는가>

ai 시대에 맞춰 교육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교육 전환에도 변하지 않을 본질은 '교실은 민주공화국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그 단위를 지키는 사람이 교사'라는 것이다(사진=교육부))ai 시대에 맞춰 교육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교육 전환에도 변하지 않을 본질은 '교실은 민주공화국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그 단위를 지키는 사람이 교사'라는 것이다(사진=교육부))

진단이 어긋났다. 대통령은 ‘금융교육이 부실한 이유’를 ‘교사가 금융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현장의 진단은 다르다. 교육과정이 비어 있고, 그 빈자리를 교사들이 비공식적으로 메우고 있으며, 정작 외부 전문가는 학교에 잘 오지도 않고 와도 학생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단이 어긋나면 처방도 어긋난다.

더 깊은 문제는 교육에 대한 이해의 결이다. 한 교사의 표현을 빌리면, 대통령은 ‘교육 수혜자’가 아니라서—즉 학부모로서, 또 학교 사용자로서 교육 현장의 시간을 살아본 적이 길지 않아서—정책의 맥락이 촘촘히 쌓이지 않는다.

1970~80년대의 교육 경험으로 2020년대의 교실을 이해하려는 세대적 거리가 더해진다. AI가 모든 갭을 메워 주리라는 막연한 낙관은, 정작 교실 안의 관계와 시간과 신뢰의 문제 앞에서는 무력하다.

<애덤 스미스가 아직 스승이라면>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올드타운에 위치한 애덤 스미스 동상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올드타운에 위치한 애덤 스미스 동상

자유(금융)시장 옹호의 원조로 호명되는 애덤 스미스(A. Smith)는 경제학이 아니라 법철학 교수였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그가 맡은 강좌는 ‘경제학’이 아니라 ‘도덕철학’이었고, 그 도덕철학 강의 안에 ‘법학(jurisprudence)’이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스미스의 법철학 강의에서 자라난 책이 바로 《국부론》이다. 그보다 먼저 출판된 《도덕감정론》 역시 같은 강의 체계 안에서 빚어졌다.

스미스에게 시장은 도덕철학과 법철학의 프레임(집) 안에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딸이고 아들이었지, 그 부모를 거역하고 홀로 선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시장의 작동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의 공감(sympathy) 능력과 정의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스미스가 강의실에서 자기 학생들에게 가르친 순서였다.

왜 그랬을까. 답은 단순하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 버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삶을 구성할 힘이기 때문이다. ‘시장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는 질문은 시장이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이며, ‘인간이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라는 더 큰 질문 안에서만 제대로 던질 수 있다.

이 큰 질문을 빼고 ‘복리 계산법’과 ‘ETF 고르는 법’부터 가르치는 교육은, 스미스 자신이 가장 경계했을 종류의 노예 교육이다. 그것은 시민을 기르는 교육이 아니라, 시장이 던져주는 신호에 빠르게 반응하도록 길들이는 노예 훈련이다.

식민지 교육의 본질을 떠올려 보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식민 권력은 피지배 민족에게 시민으로서의 자기형성(Bildung) 대신 체계에 부합하는 기능만을 가르쳤다.

회계, 측량, 위생, 산술 — 식민지 신민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삶의 의미를 묻는 능력이 아니라 제국의 경제에 효율적으로 편입되는 능력이었다.

오늘 우리가 ‘실용 금융교육’이라는 이름으로 ETF와 신용카드 사용법을 가르치자고 할 때, 그 교육이 빠뜨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신민으로 길러내고 있는 셈이 된다. 교실은 이미 시장의 내밀한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좀 더 현실에 가까이 가보자. 학생들은 돈에 관심이 많다. 돈이 권력이니 자연스럽다. 초등학생이 ‘주린이’라고 불리고, 중학생이 부동산 유튜브를 보고, 고등학생이 코인을 거래한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알고리즘이 그렇게 끌어당기고 있다.

학교의 금융교육은 어쩌면 학원에서 배운 것을 더 유치한 방식으로 배우는 과정일 수 있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유치한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반대다.

이미 시장이 확산, 확장하고 있는 흐름에 가속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지나가는 속도를 한 겹 늦추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공교육이 아닐까? ‘나는 왜 돈을 벌고 싶은가’, ‘신용은 누구의 신용이며 누가 그것을 평가하는가’, ‘부채는 왜 도덕화되는가’,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의미는 어떻게 변하는가.’ ‘나 홀로, 나 먼저보다 서로에게 좋은 이익 추구가 있는가’, 이런 질문 없이 진행되는 금융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영업사원 교육이다.

<철학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는 말한다. "교사를 교육 매개자로 존중할 때 공교육의 공공성 회복 가능하다"고. 사진은 일선 초등학교에서 담임 교사가 1학년 신입생에게 학교 안내를 하는 장면(사진=더게이트)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는 말한다. "교사를 교육 매개자로 존중할 때 공교육의 공공성 회복 가능하다"고. 사진은 일선 초등학교에서 담임 교사가 1학년 신입생에게 학교 안내를 하는 장면(사진=더게이트)

교육정책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교육이 어떤 종류의 활동인가에 대한 좀 더 오랜 고민을 같이 해보자. 근본 인식의 문제다.

헤겔(G. W. F. Hegel)이 《법철학》에서 부르주아 사회를 인륜성의 한 계기로 위치시킨 통찰을 빌리면, 시장은 그 자체로 자기조정적인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매개를 통해서만 빈곤과 천민화로 떨어지지 않는다. 학교는 바로 그 매개의 한 거점이며, 교사는 그 매개의 담지자다.

금융 전문가를 교실에 직접 투입하는 것은, 시장 체계를 매개 없이 학교라는 생활세계로 들여보내는 것에 가깝다. 하버마스(J. Habermas)의 언어로 말하면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다. 그 통로가 매끄러워질수록 교실은 시장의 논리로, 더 많이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더 적게 가진 사람이 이어받는 장소가 된다.

호네트(A. Honneth)의 인정이론에 비추어 보면 조금 더 슬프다. “교사 연수로는 안 되니 전문가가 직접 하라”는 발화는, 의도와 무관하게 교사 집단을 ‘부족한 매개자’로 무시하는 권력의 언어로 들릴 수 있다.

같은 회의에서 교사의 책임 부담을 줄이자고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 교사의 전문성을 우회하자고 말하는 것은 인정의 회복과 인정의 훼손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이다. 교사들이 공약 위반과 거짓말을 거론하며 연가투쟁까지 입에 올리기 시작한 데엔 이런 누적된 인정 훼손이 자리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의 자존심이라도 짓밟히는 순간 신화적 서사는 괴물처럼 자라난다.

<다른 길도 있다>

경기도 김포 신곡초등학교 6학년 한 교실에선 '삼다수국' 수업에 버금가는 민주주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모든 학생은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 국무총리, 장관, 의원 등을 나눠 맡는다. 학생들은 주어진 역할에 따라 학급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 역할을 맡은 반장은 학급 현안을 장관, 의원 역할을 맡은 학생들과 상의하고, 의원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이를 견제한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은 '체험'을 통해 터득한다(사진=더게이트)경기도 김포 신곡초등학교 6학년 한 교실에선 '삼다수국' 수업에 버금가는 민주주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모든 학생은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 국무총리, 장관, 의원 등을 나눠 맡는다. 학생들은 주어진 역할에 따라 학급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 역할을 맡은 반장은 학급 현안을 장관, 의원 역할을 맡은 학생들과 상의하고, 의원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이를 견제한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은 '체험'을 통해 터득한다(사진=더게이트)

어긋난 교사와 교실의 사례만큼 교사, 교실의 빛나는 이야기, 멋진 사례는 차고 넘친다. 최근 한 방송에서 소개된 어느 초등 교실의 ‘삼다수국’ 수업은 애덤 스미스의 법철학 강의를 영국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아이들이 가상국가를 세우고 화폐를 발행하고 세금을 매기며 갈등을 조정하는 이 수업은, 경제를 정치공동체 안에 다시 집어넣는다. 시장은 헌법과 법과 연대의 틀 안에서만 굴러간다는 것, 즉 경제는 정치적·법적 질서의 산물이지 그것에 선행하는 자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은 몸으로 배운다.

이것이야말로 애덤 스미스가 자기 강의실에서 법철학 안에 도덕과 경제를 함께 넣으며 하려고 했던 바로 그 교육의 이상이다. 금융 전문가가 와서 ETF와 복리를 가르치는 수업과 이런 수업은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철학자 아도르노(Th. W. Adorno)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융 전문가 교육이 시장 순응 훈련이라면, 한 교사가 보여준 교육은 국가체계의 주권자로서 시민이 서로를 빚어내는 상호 형성의 과정이다. 서로에게 좋은 시민 형성 교육은 오직 공교육에서만 설계할 수 있다. 교과 통합, 학생 이해, 관계의 시간성 — 이 세 가지가 외부 전문가에게는 구조적으로 결여돼 있다는 것은 교육 현장의 기초다.

<국민주권 정부에 바랍니다>

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는 학문적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아픔과 현안을 철학의 언어로 풀어내는 지식인이자 우리 시대 실천적 지성을 대표하는 공공철학자다. 그는 강단에 안주하지 않고, 시민을 상대로 철학의 유용성과 깊이를 전달하는 '찾아가는 철학자'로 더 유명하다(사진=더게이트)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는 학문적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아픔과 현안을 철학의 언어로 풀어내는 지식인이자 우리 시대 실천적 지성을 대표하는 공공철학자다. 그는 강단에 안주하지 않고, 시민을 상대로 철학의 유용성과 깊이를 전달하는 '찾아가는 철학자'로 더 유명하다(사진=더게이트)

진단이 잘못되었다면 처방전도 다시 써야 한다. 첫째, 금융교육의 부실은 교사의 부실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부실에서 온다. 초·중·고를 잇는 발달 단계별 연계와 생활 적용 구조부터 채워야 한다.

둘째, 외부 전문가의 학교 투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교사 우회가 아니라 교사와의 공동수업 형식이어야 하며, 교사가 비판적 매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통째로 외주화하면 교실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 내적으로 식민화된 시장의 진열장이 된다.

셋째, 교사 연수는 비효율이 아니라 교사의 전문직성과 학교 자치를 떠받치는 기간 시설이다. 연수의 질을 높일 일이지, 연수를 우회할 일이 아니다.

넷째, ‘삼다수국’ 같은 통합 시민교육 사례를 발굴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정책의 중심에 와야 한다. 교사학습공동체와 교사연구회를 두텁게 지원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하나의 해답은 없다. 바람직한 다양한 모형을 찾아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다원주의 사회의 가장 합리적인 처방이다.

이 모든 권고에 앞서 하나의 근본 물음이 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기르려고 하는가. 시장이 던져주는 신호에 빠르게 반응하는 식민지 신민인가, 아니면 국가체계와 시장과 공동체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묻고 구성할 줄 아는 시민인가. 대통령의 지시는 의도와 무관하게 전자 쪽으로 한 발짝을 옮기게 만든다.

학생들은 이미 돈에 관심이 있다. 학교는 그 관심에 가속을 붙여주는 곳이 아니라, 그 관심을 질문으로 바꾸어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학생을 1년, 2년, 3년 곁에서 지켜보는 교사다.

교육은 더는 한 국가, 한 사회의 후위가 아니다. 교육 현장이 한 국가, 한 사회의 전위가 된 지 오래다. 사회와 국가의 규범과 제도, 체계가 흐물흐물해지고 있는 액체 사회, 모든 행위, 모든 사유가 그것의 작용과 부작용을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 이 사회의 가장 전위적 현실이 교실에서 펼쳐진다.

이 현장을 모르면서 교육에 대해 말하는 모든 권력은 그 자체로 폭력으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이재명 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교사들이 현재의 부조리 상황을 ‘잔불로 처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파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 — 이 표현들은 깊은 피로와 함께 깊은 애정을 담고 있다.

시민이 만든 정부가 시민의 가장 두꺼운 한 층인 교사들의 자존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교실은 시장의 식민지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국민주권정부의 책임자들이 이 점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주시기를, 동학 농민군과 독립군과 시민군의 후예로서, 그리고 지금 교실에서 살아가는 선생님과 학생의 친구인 한 시민의 이름으로 정중히 바란다.

글 : 전남대 박구용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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